글을 쓰지 않은 지, 아니 못한 지 오래다.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전에 없던 일이다. 지금도 책상에 앉아 멍하니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잦다. 세월은 하염없다. 어제 옷을 갈아입으려 옷장에서 재킷을 꺼내다 문득 몇 주 전 가지고 다니던 작은 수첩에 거친 글씨로 휘갈긴 낯익은 글을 발견했다. 잊고 있었다. 어떤 감정에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휘둘려 써 갈기고 아무 생각 없이 주머니에 처박아 둔 것이 그제야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꽃의 정확한 이름을 알지 못했다. 겹벚꽃이라고도 왕 벚꽃이라고도 불린다는 것을, 지나가는 행인들로부터 우연히 귀동냥한 게 오래전 일이 아니다.
(죽은 고목 옆이라도, 소담한 겹벚꽃은 다시 피어 향을 더한다. - 핸폰의 한계 ㅠ)
지난 주말 비 오는 반곡지에서 아침을 만났다. 일행이 건네준 찰밥 한 덩어리로 허기를 속이고, 홀로 한참 동안 산안개와 물안개를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아주, 아주 오랫동안.
한 때는 이런 고즈넉함을 일부러 찾고 음미하고 탐닉했던 걸,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버겁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쳤다. 나무에 걸린 바람도 비에 젖어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피는 중인지... 지는 중인지, 우중 연분홍 복사꽃 색이 맘을 아리게 했고,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버드나무의 연녹색은 처연하게 다가왔다. 색 때문에 생긴 상흔은 더디게 아문다. 그 선명한 기억 때문에.
반곡지 빗방울은 둥글지 않고 세모인 듯 네모인 듯했다. 머리를 마치 목탁 치듯 툭툭 건들고, 어깨엔 멍 자국이라도 낼 양인지 심하게 치고는, 빠르게 황토 빛 땅 속으로 달아났다.
오한이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입안에 가득 담아, 요즘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내뱉는 신음소리를 막아 본다.
무심하다.
주위의 일에 흥미가 없다. 간혹 카메라를 꺼내 만지작거리기는 하지만 봄날을 그냥 보내고 있다.
아득하다.
책을 읽기도, 글을 쓰기도 녹록지 않다. 깊은 물 수렁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막걸리 몇 잔과 어설픈 안주가 그날 점심이었다. 비는 좀처럼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기로 했다. 국도를 통해 영천, 경주로 돌아오는 길, 들녘에 흩어져 있는 많은 복사꽃의 흔적을 봤다.
(벚꽃이 지고 복사꽃이 지는가? 아니면 둘 다 비슷하게 지는가?)
빗물이 차창을 어지럽히듯이 쓸데없는 상념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빗물을 닦아내는 윈도브러시처럼 생각을 비우고자 도리질해 보지만 여의치 않았다.
(겨울이 가고 홀로 봄이 와, 각양각색의 꽃들이 피고 지는데...)
꽃이 피고 지는 순간을 받아 드려야 하는, 또다시 새 봄은 왔다 가 서서히 사라지는, 그러나 그 냉정한 현실을 받아 드릴 수 없는, 미련은 아득한 절벽처럼 다가왔다.
(아직도 지지 않은 꽃이 있네? 소담한 저 꽃들은 뭘까?)
차를 세우고 가까이 가보니 바람에 부딪혔을까? 꽃 채로 떨어져 있는 모습이 애달프다. 매년 봄의 끝자락이면 보던 꽃이 올봄엔 더욱더 애잔하다.
비에 찢긴 바람이 되어, 땅에 떨어진 꽃이 되어, 아물지 않은 기억이 되어... 봄비가 그치지 않고 종일 내리고 있다. 마지막 꽃 한 송이만이라도 남겨 놓으면 좋으련만, 무정한 봄비가 내게만은, 문을 굳게 닫아 잠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