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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Jun 06. 2023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우다

4년간의 행복했던 기억의 파편들

중세 유럽에서 자살을 하거나 교수형을 당할 때, 목에 줄을 건 다음 딛고 서 있던 버킷(양동이)을 발로 찼던 혹은 차였던 관행에서, 버킷리스트(Bucket list)가 유래되었다. 즉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들을 적은 목록을 말하는 거다. 죽기 전에... 그러나 유서(Suicide note)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두 개다 죽음에 맞닿아 있긴 하지만 유서는 삶을 끝내기 전,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도 그 리스트를 작성한 적이 있었다. 하나둘셋넷다섯... 뭐 그리 욕심과 미련이 많은 지, 리스트가 길었다. 그중에서 비현실적이거나, 그냥 오기 같은 거 때문에, 혹은 하고도 후회할 것 같은 것은 과감히 지웠다. (후회...? 그러나 사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이 아니라, 하지 않은, 못한 일들이 아닐까?)     


어쨌든 그 리스트(내용은 궁금해하지 마시라) 만들다 말고 문득 나라는 인간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관점에서 나 자신을 보기보다는, 한 관점으로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품사>적인 시각에서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굳이 품사적 시점을 택한 이유는, 글을 쓰면서 문법책을 자주 뒤적이다 보니 품사와 친해진 탓이다. - 편리상 영어적 품사분류를 따름)     


                                                       <나>라는 인간의 품사     


국어든 영어든, 품사 중에서 <명사와 동사>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보통은 명사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동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는, 명사가 아무리 잘난 체 해도 그것 없어도 문장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랑해’라는 동사만으로도 의사전달이 가능하니깐. 그래서 문장에는 동사가 뭣보다 중요하고, 없으면 안 된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는 명사만 있어도 문장은 성립한다,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바보’라는 의사 표현에는 동사는 없지만 바보라는 명사 하나로, 의미를 상대방에게 100%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은 명사나 동사나 서로 잘났다고 다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일도 그런 것 같다. 다들 자기가 잘난 줄 알지만 좀 더 드려다 보면 도진개진이다.     


살면서 이런저런 일 때문에 감정적으로 힘들거나 혹은 즐거울 때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지만) 글을 쓰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로받는다. 내가 봐도 참 별나다. 그렇게 글을 쓰다 보면 남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어떤 때는 한 문장을 마무리하는데,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한참 고민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명사, 동사 중에서 뭐가 중요할까?라는 하찮은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놀곤 한다)     


그럴 때마다 이런저런 사전을 뒤적인다. 일반인들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전들이다. 그 사전들 중에서 자주 열어 보는 것 중에 한 권이 <새 우리말 갈래 사전>(서울대학교 출판부)이다. 1,200여 쪽이나 되는 분량의 사전인데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남북한 우리말이 이렇게 다양하다니...     


‘인간관계의 행위를 표현’하는 데 있어 움직씨(동사적 표현)만 해도 <거꾸러뜨리다... 덥적거리다... 알겨내다...> 등 자그마치 1천 단어가 넘는다. 그래서 인간관계라는 게 복잡한 건가? 스스로 자문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한다. 이렇게 단어들 하고 뒹굴다가 어느 날 문득, 나라는 인간의 품사는 뭘까?라고 생각해 본 것이다.     


명사는 아니다.     

그러나 가끔은 명사로 위장해 일상의 주어인척 하고 산다.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 척하지만 쓸데없이 자존감만 세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늘 삶을 주도하는 주체임을 자각하고, 끊임없이 성찰하고 변화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내가 나를 잘 안다. 명사이기엔 2% 아니, 20%가 부족하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명사가 될 자격이 없다.     


그럼 형용사일까.     

명사의 풍부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형용사는 존재한다. 만일 명사만 존재한다면 텁텁하다, 건조하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꼴이 되고 만다. 형용사는 그렇게 명사를 부각해야 하니, 화려한 조명이 필요하다.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 수 있다.     


형용사적인 삶이란, 살면서 입술에 침 발린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출세도 하는데, 나는 그렇게 못하고 산다. 그렇게 살 생각도 없지만, 그래서 나는 형용사도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부사는 아니다.     

문장에서 부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쓸모없는 군더더기다. 그래서 다른 품사들로부터 자주 무시를 당한다. 투명? 그래도 굳이 부사의 장점을 찾는다면 동사나 형용사를 도와준다는 정도. 동사나 형용사를 좀 더 풍요롭게 포장해 준다는 것이다.     


내 비록 남들 앞에 나댈 재주도 없고 즐기지도 않지만, 동사나 형용사와 친하지 않아도, 부사만큼 투명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아닌가?     


그럼 동사란 말인가.     

나의 몸과 마음은 한시도 머물지 않고 변한다. 변덕스럽다는 것이 아니다. 늘 실질적인 사고와 행동을 멈추지 않고, 실천을 스스로 이끌려고 노력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라는 존재에 대해, 깊은 고민에 자주 빠진다. 여기까지는 동사답다.     


그래서 나는 동사 같다고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만, 동사와 같이 지지고 볶는 명사나 혹은 형용사, 부사와 친한지 돌이켜 보니, 자신이 없다.     


그러다 문득, 명사든 형용사든 부사든 동사든... 어떤 자리에, 자격에, 고민하지 말고 살자고 다짐했다. 품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기능>이다. 각자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실체의 존재 목적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하는 그 자세야 말로 지향해야 될 자세다. 그렇게 치열한 삶이 짧을지 길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온전히 우리 능력 밖에 일이다. 우리의 몫이 아니다.     


열심히 살아야 할 일이다. 가끔 전에 작성한 버킷리스트 같은 것을 수정해 보면서 말이다. 지난주 목요일(2023.0601) 4년간 대구 가톨릭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동안 하루도 결석하지 않았고 강의시간에 1분도 늦지 않으며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가족을 비롯해 지인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이제 내 버킷리스트에서 하나를 지울 때가 되었다.     

<강의실로 가는 길. 109년 전인 1914년에 지어진 유스티노 관 앞. 지난 4년 동안'나를 따르라'는 늘 내 화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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