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외국어는 내게 블랙홀과도 같았다. 고등학생 시절, 규칙적이고 단조로운 일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 같았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이어지는 수업과 시험 준비, 가끔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나누던 짧은 웃음조차 그 기계 속의 잠깐의 여유일 뿐이었다. '서울대학교'라는 목표는 그 기계의 중심축이었고, 교사와 부모님, 심지어 친구들까지도 그 중심을 향해 무리 지어 달려가고 있었다. 그 중심에서 벗어나면 실패자로 낙인찍힌다는 두려움은 우리의 일상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외국어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 중학교 때 영어책을 펼쳤을 때는 좋은 인연인 줄로만 알았다. 정확히는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때였다. 그때 영어 과외선생님이 지정해주신 영어 동화책을 펼쳤는데, 그때는 즐겁기만 했다. 어쩐지 그 안에 담긴 문장과 단어들이 마치 낯선 세계의 비밀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답답하지 않았다는 건 할 만했다는 의미다. 그러다가 원하는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을 때,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흥미를 잃는 경우도 많다. 영어가 그랬다. 중학교 때까지는 괜찮은 성적을 받았지만, 고등학교로 올라가자 너무도 잘하는 아이들이 많았고, 특히 영어에서는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다른 아이들이 잘해서 그랬기도 했지만, 중3 때 이후로 정체 상태를 맞고는 더는 영어를 가장 자신할 수 있는 과목이라 말하기 어렵게 된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와서는 수학 문제나 과학 공식을 풀 때와는 달리...
‘아, 이것도 잘했다고는 할 수 없는데...’
어쨌든 영어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무겁게 느껴졌고, 문장 구조는 끊임없이 나를 방해하는 장애물 같았다. 번역되지 않는 문장은 마치 우주의 블랙홀처럼 내 안의 모든 자신감을 빨아들였다. 해석이 안 되는 문장이 시험지 위에 빼곡히 자리할 때면, 나는 마치 무중력 상태에서 방향을 잃은 우주비행사처럼 불안했다.
시험 때마다 외국어 영역은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다른 과목에서 어렵사리 모은 점수들이 외국어의 커다란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듯했다. 시험지를 받아든 순간, 검은 글자들은 내게 마치 외계어처럼 다가왔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단어와 문장은 서로 얽혀 있어 풀리지 않는 실타래가 되었다. 이해할 수 있을 듯하면서, 끝내 이해할 수 없던 문장들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불안과 두려움을 끌어냈고, 나는 점점 더 큰 공포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물론, 외국어는 매력적이다. 블랙홀의 중심에 미지의 비밀이 숨어 있다는 생각처럼, 언어는 단순히 점수를 넘어 다른 문화와 사상으로의 문을 열어주며, 그 안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영어뿐 아니라 모든 외국어는 단순히 시험 점수로 평가되는 도구가 아니며, 학습자에게 새로운 관점을 주고, 세상을 더 넓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오직 시험지에 적힌 문제와 그것을 풀어내는 능력에만 매달렸다. ‘외국어는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넘어야 할 도전의 대상이었고, 나를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끄는 힘이었다’라고 쓰고 싶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 모든 자신감은 시험지를 받아드는 순간 사라졌다.
외국어 공부는 도전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처음엔 단어를 외우고 문장을 따라 읽으며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 흥미는 오래가지 않았다. 시험 결과는 늘 내 노력의 무게와 반비례했다. 그럴 때마다 ‘왜 이렇게 못할까?’라는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점차 그 질문은 ‘내가 이걸 왜 해야 하지?’로 바뀌어갔다.
결국 외국어는 내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자 피할 수 없는 숙제였다. 대학에 진학하고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고 실패를 맛본 후, 나는 깨달았다. 외국어는 내가 완벽하게 해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냥 외국어를 안 하는 곳으로 지망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토록 어려운 과제를 도대체 왜 극복해야만 하는가? 이런 식의 합리화를 하며 끝내 회피하고자 하는 나약한 면이 내게는 있었다. 아니다. 도무지 해도 안 되는 것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건 붙들면 주변 모두가 고생이라며, 현명한 자는 끊어야 할 때를 아는 법이라며 나 자신을 위로할 수도 있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과 이해로도 충분했다면서.
어쨌든 나는 영어라는 난제를 끝내는 극복하지도 못했고, 못 하는 나를 위로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우울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별 생각이 없었다. 듣는 분들은 허탈할 수 있겠으나, 불안하기는 하면서도, 딱히 극복은 해내지 못하는 나를 그저 관망하는 기분이 들었다. 영어를 잘하는 것이 내 길은 아니라면서 수긍은 하겠는데, 그렇다고 그게 없으면 고생할 것이라는 진실은 직감하면서.
보통 책을 쓰려 한다면 이런 허무주의적 태도보다는 아무래도 삶을 긍정하고 세상의 경쟁을 이겨내는 내용으로 쓰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나 역시 이렇게 써보려고는 했다.
“어느 순간부터 외국어는 나를 괴롭히는 블랙홀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넘어서야 할 도전적인 과제가 되었다. 그 벽은 여전히 높고 견고하지만, 나는 이제 그 앞에 설 때마다 무조건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불완전한 발음과 어색한 문장으로도 나의 뜻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작은 실패를 받아들이고,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 더 큰 도전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완벽함을 추구하지만, 결국에는 불완전한 상태로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외국어가 내게 가르쳐준 것은 단순히 언어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불안과 마주하는 법, 그리고 불완전함 속에서도 나아가는 용기였다.”
문장은 어딘가 익숙했고, 제법 그럴 듯했다.
그러나 끝내 나는 위 문장을 지우고 다시 쓰고 말았다. 문장을 무작정 써놓고 여러 번 다시 읽은 다음에야, 겨우. 난 영어를 자기계발의 소재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약간은 미운 정 든 원수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