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xiety
미국에 온 이후로 많이 들은 단어가 있다면 아마도 'anxiety: 불안증' 혹은 'depression:우울'이라는 단어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한국사회가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서 좀 둔감하거나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국에서 살면서 주변의 누군가가 '난 불안증이 심해서 약을 먹어' 혹은 '우울증 때문에 약을 먹는 중이야'라고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어쩌면 한국에서는 정신적인 문제를 인정하는 것도, 치료를 받으려 하는 것도 어색한 문화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미국의 오픈된 문화가 어쩌면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쉽게 진단과 치료에 접근한 수 있는 것은 좋을 수도 있는 부분이다. 다만, 때론 그것이 지나치게 문제화되거나 과대포장된 부분이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거나, 라식수술을 받는 경우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술 전에 긴장을 할 것이고, 긴장이 심해서 공포감을 느끼더라도 어쩌면 그걸 당연한 생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다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계기가 있다.
같이 일하던 테크니션 한 명이 라식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원래도 우울증이 있어 우울증 약을 복용하던 그는 수술 전에 과도히 예민해져서 주사용 진정제를 요구했다. 그런데 그 안과에서는 라식 환자에 그런 약을 쓰지 않는 곳이라 그는 친구에게 부탁해 추가 경구 진정제를 복용하고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에 미국에 와서 일을 시작할 때 사람들이 본인이 스트레스에 민감하고 쉽게 'anxious'하다고 말을 하는 걸 듣고, 그냥 흘려 넘겼는데, 상황에 따라 점점 상태가 심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사람들과 일을 하면서 본적이 별로 겪은 적이 없었던 일이었기에, 이건 미국사람들만 이런 건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사람은 상황에 따라 스트레스를 받고 때론 예민해지는 것이 정상인데,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사회의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혹은 '과도한 일로 인한 번아웃을 피하고, 워라밸이 필요하다'가 당연한 진리처럼 받아들여졌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책 '세이노의 가르침'을 보면, 워라밸에 대한 그의 생각이 나온다. 웃긴 건 어디에 속해서 월급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워라밸을 찾고, 정작 그 꼭대기에서 수십억 수백억의 돈을 벌고 있는 사람들은 워라밸을 개에게 줘버렸다는 사실이다.
물론 개개인의 특성이 다르고, 자신의 환경에 대한 감정의 정도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과 스트레스를 얼마나 잘 조절하고 생활하는 가가 어쩌면 가정과 직장에서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의 스트레스를 소비와 연결하는 것도 하나의 단정적인 예일 것이다.
미국에 와서 다행인 것은, 저녁의 삶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집에 와서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할 여유가 있다. 물론 이곳의 공기가 더 좋아서인지 저녁의 산책과 운동으로 나의 신체기능이 좋아진 건지는 잘 알 수 없지만, 한국에서 달고 살면 알러지성 비염으로 인한 재채기가 아주 많이 좋아졌다. 코맹맹이 소리가 나지 않으니, 숨 쉬는 것도 편안해지고 평상시의 목소리마저 달라졌다는 얘기를 듣는다.
코로나 이후로 사람들은 전염병에 민감해졌고, 건강염려증이나 세균공포증도 더 심해졌다.
그러한 염려증은 또 다른 'anxiety'를 불러온다.
anxiety에 눌려 삶을 억제할 것인가, 그걸 삶의 다른 동력원으로 삼을 것인가는 각자의 몫일 수 밖에서 없다고 생각한다.
수술이 잡힐 때마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고 예민해진다. 의사는 한 가지의 분야만 충실하면 되지만, 수의사는 여러 가지 질병을 맞닥뜨린다. 늘 하는 수술도 항상 긴장을 하고 해야 하지만, 가끔 하는 수술은 더 그렇다.
그런 스트레스를 피하려 아예 수술자체를 꺼리는 수의사들도 많다.
어렵고 복잡한 수술을 하는 나를 보면서, 동료 수의사들은 나한테 'crazy'하다고 말한다. 나에게 스트레스는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동반자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