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한 술집. 침울해보이는 육중한 체격의 여자 마사(제시카 거닝)가 들어선다. 바텐더 도니(리처드 개드)가 돈이 없다는 그녀에게 따뜻한 차 한잔을 무료로 건넨다.그러자 그 여자는 급 화사한 표정을 지으며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다.자신이 잘나가는 변호사고 엄청난 부자라고.
도니는 어이가 없지만,그녀의 말을 듣고 웃어준다.그게 시작이었다.도니가 스토킹 전과자 마사의 먹잇감이 된 사건의 시작말이다. 마사는 도니를 '아기 순록'( '베이비 레인디어') 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페이스북과 이메일을 알아내 대책없는 애정공세와 성적인 농담,다 틀린 철자로 점철된 엉망진창의 글 폭탄을 날린다.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도니를 엿보고 간섭하며 도니의 일상을 뒤흔든다.
그런데 이상한게 있다.
도니는 집요한 스토킹을 당하면서 6개월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사실 도니는 마사에게 차 한잔만 건네준 건 아니었다.그녀의 이야길 들어줬고 마사가 도니의 집 앞에서 밤낮없이 죽치고 있을 때,걱정이 돼 그녀의 콧물을 닦아줬다.도니가 쌉 F형 인간이라서?
아니,드라마를 정주행하면 더 잘 이해되겠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던 거다 .
문제는 도니가 트랜스젠더인 여자친구 테리와 가까워지면서 이들의 기묘한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도니가 왜 트렌스젠더에게 끌리지?하는 의문은 곧 풀린다) 테리에 대한 질투로 마사의 상태는 더 심각해진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도니는 경찰을 찾아간다.그리고 그 순간,그동안 신고하지 못한 이유를 묻는 경찰앞에서 끔찍한 흑역사를 떠올린다.
그렇게 4화의 시작은 "불편한 장면이 있다"는 경고로 시작된다.이 때부터 이야기와 분위기가 돌변한다.
도니는 몇년 전 유명 코미디 극작가인 대리언을 만났다.대리언은 성공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일감을 주겠다고 속여 마약을 먹이고 성을 착취하는 쓰레기였다. 도니는 대리언과의 일들로 극심한 자기 혐오에 빠진다.더 최악인건 그런 인간인줄 알면서도 만남을 이어갔다는 거다.하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커리어와 성정체성의 혼란까지.. 그의 삶은 산산조각난 유리병처럼 이어붙일 수 없다.철저히 망해버렸다.
그 때 등장한게 마사였다.도니는 마사에게 뜻밖의 동질감과 연민을 느낀다.
자신을 잘생겼다고,재밌다고,눈빛에 뭔가가 있다고,사랑한다고,끊임없이 속사포를 쏘아주는 존재가 자기 환멸에 빠져 땅굴을 파던 당시의 도니에겐 필요했던 것이다.(물론 마사가 돌아버릴 때는 제외하고 말이다)
도니는 생각한다. 자신을 '아기 순록'이라 부르는 마사는 정신이 아픈 사람이지만,대리언은 악마 그자체인 인간이라고 .
" 내가 대리언 대신 마사를 신고하는게 과연 맞는거야??!"
(코미디언으로 뜨고싶은 도니 .이 꿈은 비극의 씨앗이 된다)
드라마의 후반부, 신인 코미디언 콘테스트 결승전에 난입한 마사가 도니를 공격하며 엉망이 돼버리자 낙심한 도니가 자신이 겪고있는 스토킹과 트라우마를 눈물 콧물 범벅이 돼 고백하며,일약 온라인에서 스타가 된다.
그리고 마사는 실형을 받는다.
그러면 이제 해피엔딩이냐고? 절대 아니다.
성공을 갈망하던 도니의 욕망은 끝나지 않았고 대리언과의 관계도 끝난게 아니며,이제는 감옥에 들어간 마사를 그녀가 보낸 음성 메시지를 반복해 듣는것으로 도니가 집착하기 시작한다.
드라마의 결말부분은 그래서 뻔하지 않다.도니의 자기혐오도 끝나지 않았다.가해자는 불편한 진실의 방에서 여전히 포식자의 안락함을 누리고 있다.여전히 슬프고 아프며 처절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우울한 도니에게 친절을 베푼 남자는 도니에게 찾아온 어떤 희망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도니가 자신이 마사의 모습과 데자뷔가 된다는 걸 알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장면에서,도니는 마사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됐을 뿐이다. 그것은 자신이 왜 마사를 내칠 수 없었는지 스스로 품은 의문의 답을 찾았을 뿐이다.
▶ 인간관계의 불편한 심연을 들여다보는 심리드라마
이 드라마는 다소 뻔해보이는 스토커에 대한 이야기를 단순히 가해자-피해자가 아닌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며 인간관계의 심연과 트라우마,이해할 수 없는 면모들을 들여다보게 한다.그게 이 드라마의 특별한 점이다.
통렬하고도 타율 높은 영국식 유머가 때때로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한편의 심오한 심리드라마를 본 듯한 만족감을 준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영국의 작가인 리처드 개드가 직접 겪은 이야기다.그는 이 이야기를 모놀로그(1인극)연극으로 만들었고 넷플릭스에서 드라마의 각본과 연출, 주인공을 맡아 완성했다.이 시리즈를 보면 그의 재능은 드라마와는 달리 엄청비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넷플릭스 공개 그 후...
이 드라마가 넷플릭스에 공개 돼 히트하면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현재 영국에선 드라마에 과몰입한 네티즌 수사대가 도니를 성착취한 실존인물,그리고 마사의 실제인물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어있다고 한다.(이미 몇몇 유력한 용의자가 인터넷상에서 테러를 당하고 있다.)
리처드 개드가 자신이 이 일로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고있다며,자신은 실제인물을 밝힐 의사가 없으니 드라마팬들에게 수사를 멈춰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예상가능한 후폭풍이다.
처음엔 코믹 스릴러인듯 했지만,다크하고 충격적이며 심오한 이야기로 무방비의 뒷통수를 후려치는 이 드라마가 한동안 생각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