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전 잡채밥이요
팀원들이 다 같이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일처리를 위해 점심으로 중식점을 고른다.
이 상황에서 모두가 짜장으로 통일할 때 나 혼자 다른 메뉴를 시킬 수 있는가?
요즘은 개인의 취향이 더 존중받는다지만 그래도 살짝 눈치를 보게 된다.
누가 눈치를 주거나 압박을 해서도 아니다.
내가 만든 투명한 박스에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에 제약을 건다
이 박스는 집단적 착각처럼 보통사람이나 대중의 의견이라고 내가 지례 짐작해 자기가 스스로 검열을 하게 만든다.
여기서 집단착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그 검증되지 않은 대중의 의견은 무엇인가?
위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 나 혼자 다른 메뉴를 고른다며 음식이 늦게 나와 점심시간이 길어지겠지?
- 길어지면 일처리가 늦어져서 팀에게 피해가 가겠지?
집단 착각이 없는 세상은 없다. 내가 만든 투명한 박스를 없애려면 생각이 아예 없거나 내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 박스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기 위해 내가 속한 한국사회나 직장이나 가족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을 살펴보자.
상상력과 생존
창의력과 상상력은 개인의 경제능력과 비례하지 않는다. 경제력뿐만 아니라 물질적, 시간적으로 더 여유롭다고 개인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더 뛰어난 거 같지는 않다.
반면 사회나 그룹이 물질적, 정신적으로 위기를 겪고 있다면 자신이나 타인이 개인의 행동을 제한하기 마련이다. 눈앞의 위협을 피하고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협동이 필요해서이다. 그리고 한국은 생존의 위기(한국전쟁이나 민주혁명 등)에서 벗어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행동을 제한받은 개인은 자신의 생각 또한 제한하게 된다.
충분히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서커스 코끼리는 가는 사슬을 끊어낼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모두들 생존을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했지만 결국 인생의 의미를 묻게 되는 팍팍한 사회가 되어 버릴 수 있다.
이런 이슈들은 철학적인 질문으로 던지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답은 몰라도 확실한 것이 있다. 개인의 취향이 제한받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취향의 영역이나 크기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취미의 밀도라던지 그 수준이 다양한 것이 좀 더 건강한 사회로 보인다. 가령 취미로 골프를 배운다 하더라도 그 수준이 다양한 것이 좋다. 아마추어 선수급에서부터 노인수업 정도로까지 말이다. 한국에서 골프를 배운다 치면 주변의 잔소리가 아주 심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스코어와 자세이다. 그 목적의 또한 다양하지 못했지만 이젠 수십 년간 골프생활을 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 취미를 즐기는 그룹(사회)이 좀 더 성숙해졌다. 스크린골프에서부터 파크골프라는 것도 생겨났다. 다양성이 부족하면 지속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종種은 오랜 기간 동안 생존하려 한다. 돌연변이를 만들어서라도 다양성을 가지려 노력한다. 다양성이 부족하면 빨리 번영할 수 있지만 한 번에 위기에 몰살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공부의 목적은 무엇인가?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 목적이 아주 다양하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입시, 취업, 성공으로 요약된다. 과연 인생에서 공부의 목적이 대략 성공이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는 괴짜와 같은 개인의 취향과 다양성이 얼마만큼 배양되어 있는가? 그들이 오타쿠라고, 별나다고 따돌림이나 배척의 대상이 되진 않는가?
한국은 시장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비교적 최근에 도입했다. 과거(한 가지의 위기)엔 협동과 통일된 마음이 생존에 유리했지만 상황이 이미 변했다. 하지만 사회적 통념과 개인들의 관념은 빠르게 전환되진 못했다. 짜장면을 고르지 않더라도 전혀 눈치가 보이지 않는 사회를 넘어 괴짜도 대중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회가 이미 도래했으니 우리는 좀 더 기민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