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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미 Oct 30. 2016

엄마의 기도

책 읽어주는 엄마의 목소리

‘어둡고도 조용한 방.

  어린 자매가 나란히 누운 침대 머리맡에 놓인 촛불이 희미하게 방을 밝혀주고, 두 눈을 감은 소녀들의 곁에 앉은 젊은 엄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책을 읽고 있다.’     


  책을 읽어주는 엄마의 모습이란 내게 그러하다. 어린 시절 우리 엄마가 그런 모습으로 매일 밤잠을 청하는 우리 곁에서 책을 읽어주셨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빠는 늘 늦은 시간에 퇴근을 하셨다. 그래서 우리 자매를 재우는 몫은 늘 엄마의 것이었다. 세 살 터울의 언니와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잠을 잤었는데 매일 밤 엄마는 그런 우리가 잠자리에 들 때마다 책을 읽어 주셨다.


  이제와 그때를 회상한들 솔직히 그때에 엄마가 읽어준 책의 내용을 기억할 수는 없다. 명작동화를 읽어주시기도 하셨고, 세계의 다양한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주셨던 것도 같지만 확실하지가 않다. 적어도 25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버렸기에 그 이후의 시간 속에 뒤엉켜 버린 나의 기억을 확신할 수가 없다. 하지만 또렷하게 잊히지 않는 것은 책을 읽어주시던 엄마의 모습과 그 목소리이다.      


  엄마는 늘 촛불을 켜 놓은 채 책을 읽어주셨다.

  지금이야 어린 자녀를 재울 때 켜 놓을 수 있는 좋은 보조등들이 많다지만 아마 그때만 해도 엄마에게 가장 좋은 등불은 촛불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기도를 드릴 때도 성모상 앞에 촛불을 밝히셨는데 우리에게 책을 읽을 주실 때엔 그 초와 촛대를 우리의 머리맡으로 옮겨오셨다.


  두 개의 초는 방 안을 가득 채울 만큼 밝은 빛을 내진 못 했지만 눈을 살며시 뜨면 엄마의 얼굴이 아른아른 보일 만큼 은은했고, 엄마의 목소리는 참 나근 했다. 부산 사투리를 쓰는 엄마였지만 우리 엄마의 말투는 드세지 않고 부드러웠다. 잠을 청하는 우리에겐 자장가로 딱 좋은 따뜻한 억양이었고, 또 한편으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잠을 잊게 하는 신비로움이 묻어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살짝 눈을 뜰 때면 인자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로 얼굴을 만져주는 그 느낌도 너무 좋았고, 언니와 맞닿은 이불속의 공간은 참 포근했었다.      

  엄마는 그렇게 우리가 잠이 들어도 책 읽기를 멈추지 않으셨다. 우리가 아주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엄마는 책을 읽고 또 읽으셨다.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또는 아빠가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실 때까지도 책을 읽어주셨다. 우리가 듣고 있거나 혹은 듣지 않거나는 엄마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는 다만 우리를 향해 책을 읽어주시고 계셨다.     

메리 카셋의 作

  이제는 세월이 훌쩍 지나 내가 엄마가 되었고, 나도 이따금씩 아들에게 책을 읽어준다. 이제 곧 두 돌을 앞둔 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책만 읽어주길 원하는데, 제법 혀를 굴리며 어쭙잖게 제목을 말하면서 책을 뽑아 들고는 내 무릎에 앉는다. 그러면 나는 아들이 가져온 책을 읽어준다. 몇 번씩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어주다 보니 이젠 아들이 내 말투를 따라 하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귀엽다.     


  특히 아들은 동물 책을 좋아한다. 고양이 책을 읽을 땐 아기 야옹이 소리를 내며 아들의 얼굴을 살짝 긁어주는데 간지럽다고 갈갈대는 모습이 우습다. 토끼 책을 읽을 땐 토끼의 빨간 눈을 가리키며 훌쩍훌쩍 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데 아들은 이미 입을 삐죽하며 우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좋아 오늘도 나는 아들에게 책을 읽어준다.     


  엄마의 소망을 가득 담아 책을 읽어준다. 호랑이 책을 읽을 땐 아들이 씩씩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식사예절 책을 읽을 땐 아들이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사랑을 전달한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소리로 가장 부드러운 마음을 담는다.     


  자식에게 책을 읽어준다는 건 바로 그런 것 같다. 단순히 똑똑해지길 바라는 지식적인 배부름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을 전달하는 하나의 속삭임 같은 것. 엄마가 읽어주는 책에는 자식이 따뜻한 마음으로 자라길 바라는 믿음과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는 소망과 세상의 행복을 다 누려보길 바라는 희망이 담겨 있다. 마치 그것은 나의 기도와 같다. 아들을 향한 나의 간절한 기도.      


  25여 년 전, 매일 밤 촛불 두 자루에 환하게 불을 붙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시던 우리 엄마. 아마도 그건 두 딸을 위한 엄마의 기도였나 보다.


  오랜만에 엄마의 그 기도 소리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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