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에 보내는 헌사 혹은 찬사
넷플릭스의 신작 흑백요리사는 생각보다 더 대단한 프로그램입니다. 다른 예능들과 비교해 얼마나 더 재미있을지, 얼마나 더 인기를 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콘텐츠를 만드는 데 정말 엄청난 수고가 들어갔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비슷한 콘텐츠를 제작해 본 경험자의 입장으로 흑백요리사를 시청하니, 잊고 있었던 십여 년 전의 기억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더군요. 아니 어쩌면, 기억이라기보다는 트라우마에 가까운 무언가가 말이죠.
이 프로그램이 대단한 첫 번째 이유는 바로 ‘100명의 참가자’ 입니다. ‘엑스트라’ 보조 출연자가 100명만 있어도 현장은 아비규환입니다. 그런데, 흑백요리사의 100명은 모두가 출연진입니다. 무엇이 다르냐고요? 100명의 목소리를 따야 합니다. ‘수음’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내는 오디오가 방송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품질로 녹음되어야 합니다. 무선 마이크를 세팅하고, 채우고, 확인하고, 수거하고, 참가자별로 분류하고. 생각만 해도 아찔해집니다.
오디오만큼 비디오도 문제입니다(어쩌면 더 문제입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특성상 어디서 어떤 그림이 나올지 모릅니다. 1명당 1대의 카메라가 붙을 수는 없겠지만 1명의 카메라팀 스태프가 감당할 수 있는 출연진 수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미집, 거치, 폴캠, 냉장고 안 빅시아까지. 얼마나 많은 수의 카메라가 필요할까요? 회차가 거듭되면 탈락자가 발생해 필요한 카메라의 수가 줄겠지만, 모든 출연진이 동시에 나오는 첫 촬영날을 상상해보니 정신이 혼미합니다.
100명의 출연진과 관련해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되는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이들이 ‘일반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예능 촬영에 익숙한 연예인들과 작업하는 일은 비교적 수월합니다. 언제 어떤 흐름에 자신들이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알고 있고, 무엇을 하면 안되는지 확실히 숙지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들은 일반인입니다. 유튜버 분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이들도 ‘레거시’ 예능 촬영에는 익숙하지 않은 그야말로 ‘방송 초보’ 들입니다. 촬영장이 처음인 이들을 관리하고, 격려하며, 위로하고, 다그치고,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또 촬영 흐름에 대해 교육해야 합니다. 애초에 이들이 모두 모였는지 확인하는 일만해도 쉽지 않습니다. 이 일들은 보통 연출팀(PD)과 작가진이 하는데요,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100명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리얼리티 경연 프로그램의 고질적 고충도 존재합니다. 제작진(PD와 작가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이 안되는 문제이지요. 좋은 그림, 재밌는 상황을 위해 그리고 화제성을 위해 꼭 길게 살아남아줬으면 하는 참가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심사위원들은 ‘콘텐츠의 흥행’도 신경 쓰지만, 그 이전에 ‘전문가로서의 권위와 자존심’도 신경을 써야 하니 제작진과 생각이 다른 경우가 많이 나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적을 순 없지만,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일부 출연자를 보며 ‘PD가 속이 좀 쓰리겠구나’ 싶었습니다. PD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2~30년 전이면 개입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요즘의 촬영장에선 조금의 부정도 생각해선 안됩니다. 갑자기 실형을 받고 나온 엠넷의 선배들이 생각나네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건 사실 일반적인 경연 프로그램, 예컨데 <프로듀스 101>이라던지, <쇼미더머니> 같은 프로그램들에서도 마주할 수 있는 어려움입니다. 다만, 흑백요리사가 ‘더’ 대단한 이유는 바로 ‘요리를 하는’ 콘텐츠이기 때문입니다. 불과 물을 사용해야 하니 세트를 만드는 일부터가 문제입니다. 일반 세트 제작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합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또 있습니다. 바로 식재료입니다. 참가자들이 직접 가지고 오는 식재료들. 이 식재료는 신선한 상태로 보관되어야 합니다. 냉장고가 많이 필요하겠죠? 만약 살아있는 활어를 준비했다면? 수조가 필요합니다. 수조에 세팅되어야 하는 염도와 수온은 재료별로 다릅니다. 문어와 다금바리를 같은 어항에 넣을 수 없습니다. 경연을 앞둔 참가자가 직접 어렵게 준비한 재료가, 만약 경연 직전 상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거기에 그 참가자가 어쩔 수 없이 상한 재료를 사용해 경연에 참가했는데, 심지어 탈락했다? 이후에 발생할 문제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이렇듯 흑백요리사는 너무 어렵습니다. ‘일반인 100명과 함께’, ‘화기와 칼을 사용하는’, ‘음식을 만드는’, ‘대규모 경연’이기 때문입니다. 촬영장의 연출팀, 작가진, 카메라팀, 조명팀, 음향팀, 진행팀, 무대 감독, 헤어메이크업 누님, 배차기사님, 밥차 어머님, 앰뷸런스 형님, 경비아저씨, 설거지 아줌마까지 모두가 한마음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합니다.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모든 이들, 그리고 그곳에 나오지 않는 이들까지. 이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고생한 모든 분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여담1. 사람들은 예전에 제게 이런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PD들은 출연진들이 만든 음식 먹어?”
답은 “기본적으로 먹지 못한다.”입니다. PD들이 한가로이 그 음식을 먹고 있을 시간도 없고, 주변 수백 명의 스태프들이 보고 있는데 눈치 없이 그 음식을 먹겠다고 달려들 수도 없습니다. PD는 촬영장의 총감독과도 같아서, 다른 스태프들을 관리하고 지시해야 하는데 음식에 한눈을 파는 행위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있습니다. 메인 PD와 메인 작가 정도는 (음식이 남았다는 가정 하에) 맛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들이 음식을 맛보는 것은 콘텐츠 완성도를 위해서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갑니다만, 현장의 다른 스태프들의 입장에선 조금 부럽기도 약간 서운하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여담2. 사람들은 요즘 제게 이런 질문들을 많이 합니다.
“백종원하고 안성재하고 진짜로 싸우는거야? 대본 아니야?”
답은 “네 맞습니다. 그들은 많이 싸웁니다” 입니다. 흑백요리사에 표현된 다툼이 진짜인지는 제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심사위원’들은 실제로 (기분이 상할 정도로까지) 다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이고, 그들에게는 방송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연예인들이라면 방송을 위해 좋게 좋게 넘어가는 어떤 ‘규칙’들이 그들에게는 잘 통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들이 다투면 PD입장에선 좋을 수 있습니다. 쓸 수 있는 그림이 많아지거든요. 다만, 논란이 될만큼 심해지면 안되니, 내보내는 그림을 잘 조절할 수 밖에 없지요.
십수년 전, 방송국에 갓 입사한 저는 연출팀 막내로 요리 경연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아직도 생생합니다. 새벽 4시에 촬영장으로 향했고, 오전 9시에 촬영을 시작했는데, 다음 날 새벽3시쯤 촬영이 끝났습니다. 촬영이 끝나고, 추가 인터뷰 촬영에 뒷정리를 마치고 나니 아침 9시였습니다. 30여시간정도를 쉬지 않고 일했던 즐거운(?) 추억이네요. 이런 대형 프로그램은 그 성패를 떠나 연출팀에게는 큰 뿌듯함을 선사하긴 합니다. 다른 촬영장에 비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많이 나오죠. 지나고 보면 그렇지만, 촬영을 하는 동안은 정말로 힘들었어요. 군대 훈련소때보다도 무자비했던 그런 느낌이네요. 그렇기에 저는 흑백요리사가 대단한 프로그램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습니다. 재미를 떠나서, (실현하기 어렵지만) 누구나 상상해보았을 유쾌한 기획을 (어렵게) 화면에 담아 우리에게 보내준 제작진에 이 헌사를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지금도 현장에서 방송을 만들고 있을 동료 선후배들이 오랜만에 부러워지는, 정신없이 복잡한 촬영장이 그리워지는 그런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