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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훈 Oct 11. 2024

내겐 읽기 너무 어려운 한강 작가의 소설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에 대한 찬사


 소설을 고르는 일에는 썩 재주가 없다. 지하철을 타고 내리다 서점을 지날 때면 의무감 같은 것에 두어 권을 집어 오곤 했다. 한 권을 읽으면 다행일까. 그렇게 대충 가져온 책들을 대할 때면, 그만 읽어야 하는 이유를 찾아내는 데만 몰두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럼에도 나름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이 있었다. 서평을 보는 것이다. 나는 좋은 서평을 읽기 위해 ‘창작과 비평’, ‘문학동네’, ‘문학과 사회’ 같은 계간지를 보곤 했다. 2013년 최인호 선생이 작고하셨을 때, 문학동네에 한 편의 추모글이 실렸다. 바로 한강 작가의 글이었다. 스승에 대한 애틋함이 담담하지만 따뜻하게 담겨 있었다. 이것이 나와 한강의 첫만남이었는데, 따뜻함을 간직한 섬세한 작가라고만 생각했다.


2014년 가을, 역시 광화문역 서점에 들러 책 ‘쇼핑’을 하고 있었다. 그때 성석제 작가의 <투명인간>이 한창 인기였다. <투명인간>을 집어들고 하루키의 신작 따위를 뒤적이던 중, 매대에 ‘한강’ 이름 두 글자가 보였다. 책 제목은 <소년이 온다>였다. 당시 내가 한강에 대해 알던 것이라곤 최인호 선생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고, 가장 뛰어난 제자였다는 것, 그리고 유명 문인의 딸이라는 점 정도? 울림이 있던 그 추모의 문장들이 생각나 <투명인간>과 함께 <소년이 온다>를 계산대에 올렸다. 공교롭게도 둘 다 '창비'의 책이었다. 묘하게 좋은 예감이 들었다. 


<가장 읽기 어려웠던, 소년이 온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는 쉽게 읽히지 않았다. 함께 데려온 <투명인간>은 하루 만에 읽었지만, 한강의 책은 페이지가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너무 아팠다. 나는 너무 슬픈 영화를 볼 때면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순간을 피하려고만 한다. 그런데 한강은 그 슬픔, 아픔을 외면하지 않더라. 그녀가 책에 써놓은 것들은 이국적인 이야기도, 수세기 전의 오래된 전설도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아픈 기억들에 관한, 광주에 관한, 평범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전해주는 작가의 문장은 부드럽고 매끄러웠지만, 내내 이어지는 통증에 이내 책을 덮게 만든다. 그냥 덮는 것이 아니라 신음 소리를 내쉬며 덮었다. 스승에 대한 추모글만 접했던 내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아마 내게는 가장 읽기 어려웠던 글이었지 싶다.  


겨우겨우 <소년이 온다>를 다 읽으며 나는 잊지 않는 법을 배웠다. 정확히는 잊고 있었던 사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내 기억 속 휴지통 어느 구석에서 꺼냈다. 나는 퍽 다혈질이라 감히 따라할 수도 없겠는데, 작가는 본인의 감정은 얌전히 눌러놓은 채로, 차분하게, 그리고 수려함은 억지로 감추며, 광주의 비극과 그로 인한 슬픔과 고통을 다시 알려주며, 잊지 말아야 한다고 무섭도록 근엄하게 이야기했다.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치며 읽기도, 청승맞게 엉엉 울기도 하며 읽었다. 마지막 에필로그까지 읽어낸 뒤 느꼈던 아픔이 아직도 멍처럼 남아 있는 것 같다. 




가끔 <소년이 온다>를 꺼내 읽는다. 노랗게 바랜 내 책은 2014년 5월 23일에 발행된 초판 2쇄다. 지난 10여 년 동안 숙제처럼 꺼내 몇 장씩 읽고 덮는다. 작가의 다른 책들도 좋았지만, 특히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마치 작가에게 담담히 개인 교습을 받는 느낌이 좋았다. 때로는 체벌을 받는 기분도 들었다. 나는 <소년이 온다>를 주변에 이십대여섯 권은 선물했던 것 같다. 누군가 한국 소설을 추천해 달라 부탁해오면 언제나 한강 작가를 먼저 말했다. 사실 한강 외에 딱히 좋아하는 작가가 없어서였기도 했겠지만, 그만큼 내게는 소중한 책이고 작가였다.


<소년이 온다 에필로그 : 눈 덮인 램프 207p>


몇 년 전, 한강이 맨부커상을 받았다. 뛸 듯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노벨문학상도 받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부렸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게 과한 욕심이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오늘만큼은 이 권위에 기대 세상에 외치고 싶다. 역사를 부정하고, 아픔을 무시하고 슬픔을 조롱했던 수많은 이들에게 '이것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아직 그날 광주의, 그리고 그 앞 제주의 아픔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더 당당히 권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기괴하고 강렬하지만 과잉 없이도 울림을 깊게 낼 수 있는' 그 불편한 건조함, 그 독특히도 담담한 문장들을 더 많이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좋다.




벌써 세간에서는 이번 수상에 정치적 고려가 있었을 거라며 평가 절하하려 한다.. 그런 얘기보다는 그냥 그녀의 책을 읽자. 읽었으면 또 읽자. 그리고 잊지 말자.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떠올리자. 불편하더라도 읽고, 잊지 말고. 


어찌 되었든 오늘은 너무나도 행복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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