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를 위한 자격논쟁
“니가 언제부터 책을 읽었다고?”
한강 작가 덕에 독서 인구가 부쩍 증가하니 친구들 사이에서 독서 자격에 대한 시비가 오가는 것이 들려온다. "그냥 계속 유튜브나 봐라", "곧 당근 하겠네" 같은 조롱에서, 그에 맞서 발끈해 늘어놓는 구구절절한 독서 이력 변호까지. 아니, 한 번 생각해보자. 책을 평소에 많이 본 사람만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누가 독서를 처음 시작할 수 있는 것일까? 그냥 책 하나 읽겠다는데 우리는 서로를 곱게 봐주지 못하고 있구나!
최근 비슷한 말을 들었다. 어떤 지인과 식사를 하던 중, 연말 오페라 공연 티켓을 예매했다고 하니, 의아한 얼굴의 상대방에게 돌려받은 말은 “승훈님‘도’ 오페라를 좋아하세요?”였다. 조금 당황했지만, 솔직하게 처음이라 얘기하니, 마주한 그 얼굴엔 안도감이 보이더라. 그가 보기에는 내 재산, 내 수준, 내 지위가 아직 오페라를 보기에는 부족했던 것일까? 오페라에 정통하지 못해 그걸 위한 어떤 특별한 자격 기준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런 일도 있었다. 10년 전, 한창 재즈에 빠져있을 때였다. 재즈를 즐겨 듣는 게 당연히 자랑은 아니다. 그러기에 주변에 ‘나는 재즈 매니아야’라고 이야기하고 다닐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매일같이 재즈를 갈구했던 터라 나는 ‘재즈를 위한’ 여행을 떠났다. 먼저, 미국 뉴올리언스에 갔다. 재즈의 성지, 프리저베이션 홀(Preservation Hall)에서 루이 암스트롱의 정취를 찾는다. 버번 스트리트를 거닐며 온종일 재즈에 나를 억지 피폭시켰다. 마침 미국에서 쿠바로 가는 하늘길이 막 열렸던 때라, 내친김에 쿠바 재즈(Cuban Jazz)를 듣기 위해 하바나로 향했다. 말레꼰 해안도로의 석양과 바라데로의 푸른 바다는 덤이었고, 밤마다 모히토와 다이키리, 그리고 클라베의 타격음에 취해 갔다.
재즈만을 위한 여행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왔을 때, 수많은 물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쿠바에 갔어?", "뉴올리언스가 어디야?" 간단한 질문들에 답을 해주니 이어지는 반응은 오페라와 다름없었다. “네가 언제부터 재즈를 좋아했어?”, “너 락발라드 좋아하지 않았어?” 심지어는 “허세가 심하네”라는 농담 탈을 쓴 진심 담긴 조소까지.
오페라에 정통해야만, 재즈에 익숙해야만 비로소 그걸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닐 텐데. 서재에 책들이 빼곡해야 독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고. 모르니 배우는 거고, 궁금하니 들으려는 걸 텐데. 그저 익숙하지 않고, 어려울 것 같고, 값비싸 보인다고 호기심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우린 이런 노력들을 경계한다. 클래식, 재즈, 오페라, 독서 같은 것들을 말할 때면 ‘너와는 어울리지 않아’라는 은근한 비웃음이 들린다. 유약한 나는 그저 눈치를 보며 즐길 수 밖에 없다.
학부 사회학개론 시간에 배우는 부르디외의 개념들을 빌지 않더라도, 이건 너무 자명하다. 내게 익숙한 (고급)문화를 즐기는 데에는 일정한 ‘자격’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우월감, 새로운 것을 경험해보고 싶은 호기심, 나랑 같이 터보의 ‘어느 째즈바’를 듣던 친구가 진짜 ‘째즈’를 즐기려 할 때 느끼는 낯섬과 두려움. 이런 마음들의 앙상블이 오늘도 내 접근성을 제한하고 있다. 이런 배제와 경계보다는 존중을 받고 싶다. 나는 K2와 얀을 가장 많이 듣고 컸지만, 브루노 마스도 콜드플레이도 좋아하고 디지 길레스피도, 오스카 피터슨도 더 많이 듣고 싶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10번은 넘게 봤지만, PTA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도 보고 싶다. 무엇보다 이런 것들에 대해 자유로이, 편하게, 즐겁게 이야기하고 싶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