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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훈 May 13. 2022

여행지에서 답을 구한다는 것

히말라야 산맥에서 엄홍길 대장님을 만난다면


 부끄럽지만 학부시절 고시공부를 했었습니다. 당시에 소위 잘났다는 친구들이 일찌감치 컨설팅, 금융권, 그리고 고시공부를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고 나는 뭘 해야 할까? 고민했죠. 내 적성이나 선호에 대한 고민보다 우선했던 것은 바로 제 학점이었습니다. 당시 1점대 누적 평균을 기록하고 있던 저는, 즉시 고시공부에 돌입했습니다. 유일하게 고시만이 학점이 필요하지 않았거든요. ‘학점이 안 좋아서 고시공부를 시작했어요’라는 황당한 입문 동기와 함께 제 수험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공부는 잘하던 사람이 잘합니다. 교양수업에서도 C를 겨우 받던 제가 고시공부를 수월히 할 리가 ‘당연히’ 없었겠죠. 운이 좋아 1차 시험은 3년 연속 합격을 했지만, 2차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신 뒤 수험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수험기간 해외여행을 수차례 다니고 여자 친구가 여러번 바뀌었으니, 수험생활이라 하기에도 부끄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락으로 인한 좌절감, 자괴감은 매우 컸습니다. 고시는 김춘수 선생님의 시의 ‘꽃’처럼 ‘합격해야만 의미를 획득하는 시험’입니다. 낙방한 고시생의 미래는 암담 그 자체였습니다. 마지막 시험의 불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살아갈 ‘길’을 찾고자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히말라야의 높은 설산에 오르는 것을 성공하면, 가슴속 답답함이 해소되고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저는 네팔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계속되는 실패로 인해 산산조각 난 자신감을 회복하고 작은 성취감이라도 맛보고 싶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히말라야가 제게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칼라파타르로 가는 길>



 지금은 6,000m급 등반 경험도 가지고 있지만, 당시에는 5,644m의 칼라파타르 봉우리에 도전했습니다. 대중적이고 어렵지 않은 코스였음에도, 지속된 수험생활로 인해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던 제게 완등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것까지 실패할 수는 없다!’는 정신력을 발휘해 아득바득 정상에 올랐고, 오랜만의 환희와 함께 하산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 성취감과는 별개로, 그렇게 찾고자 했던 제 미래의 ‘길’은 아쉽게도 그곳에 없었습니다.



 카트만두로 돌아가기 위해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공항이라고 불리는 루클라의 텐징-힐러리 공항에서 경비행기를 탑승해야 했습니다. 아찔한 절벽 끝에서 뚝 끊겨버리는 짧은 활주로를 바라보며 겁에 질려 있던 제 옆자리에 한 한국인이 탑승했습니다. 바로 엄홍길 대장님이었습니다. 평소 흠망해 마지않던 전설적인 산악인을 만난 저는 들뜬 마음에 인사를 드렸고, 대장님도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히말라야 여행에서 만난 엄홍길 대장님이라니! 기쁨에 취한 채, 30분간 산과 인생에 대한 신나는 대화를 나눴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찔한 활주로 - Tenzing-Hillary Airport by Frank Kehren>


 "대장님! 저는 실패의 경험을 씻고 답을 얻고자 칼라파타르에 올랐어요! 그리고 마침내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원하고자 하는 것은 얻지 못했어요" 격양된 제 이야기를 듣고는 귀엽다는 듯 웃음을 보여주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젊었을 적 힘든 일이 있을 때 칼라파타르에 올랐었어! 그런데 나는 답을 찾지 못했어. 다른 곳도 계속해서 올라봤거든? 그런데도 산은 답을 계속 주지 않더라고! 얼마나 치사했던지 몰라.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그 과정들을 반복하다 보니 스스로 답을 찾을 준비가 되었던 것 같아" 제 구질구질한 사연을 다 말씀드리지 아니했음에도, 엄홍길 대장님은 그렇게 제게 ‘적확한’ ‘답’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가끔 특별한 ‘목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납니다. 이별을 잊기 위해,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번잡함에서 도망치고자,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여행을 계획하죠. 그런데 어떤 여행이 원하는 답을 담보하진 않는 것 같아요. 특정한 여행지를 방문하는 것 자체로 ‘유레카!’를 외치며 마치 ‘돈오점수’하듯 답을 얻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엄홍길 대장님의 말씀대로 그런 여행을 통해 일상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들과 만나고, 생경한 경험들을 하며 나에게 맞는 길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거겠죠. 그렇게 여행을 통해 나만의 길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양분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칼라파타르의 정기를 받고, 엄홍길 대장님의 덕담을 들은 저는 호기로움과 함께 당당히 귀국합니다. 하지만 그런 행운이 따랐음에도 이후 승승장구하지는 못했습니다. 늘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했고, 예상하지 못한 변수들이 찾아와 중요한 일들을 그르치는 중입니다. 비관도 많이 했지만 결국은 실력에 비해 답을 빨리 얻고 싶어 한 제 조바심이 문제였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다시 답을 찾기 위해 스카이스캐너에 접속합니다. 다시 또 답을 구할 할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대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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