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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훈 May 25. 2022

신혼여행을 친구들과 함께 떠나도 괜찮을까?

나의 오사카 신혼여행기


 “그래서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 신혼부부들이 많이 받는 질문입니다. 대답으로 칸쿤이나 몰디브 정도를 댈 수 있다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요즘의 모범답안이니까요. 유럽이라고 대답하면? “대단하다”라는 감탄과 함께 “그래도 신혼여행인데 휴양이 좋지 않겠어?”라는 조심스러운 훈수도 함께 돌아옵니다. 만약 세이셸이나 보라보라 같은 곳이라면 대답하는 목소리에 힘을 좀 더 실을 수 있습니다. 듣는 사람들도 큰 부러움을 표현할 겁니다. 그런데 푸켓이나 발리가 등장하면 “아, 그래” 같은 싱거운 반응을 보이며 “그래도 신혼여행은 하와이가 좋을텐데”라고 슬쩍 본인의 경우를 자랑합니다. 돈을 보태줄 것도 아니면서 다른 사람의 신혼여행에 너무 큰 관심을 갖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사실 예산만 충분하다면 주변의 부러움을 사는 신혼여행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몰디브라면 특히 더 수월합니다. 수많은 여행사들에서 제시하는 ‘허니문 패키지’ 목록을 보면 개별 리조트들의 등급이 잘 구별되어있으니, 이를 근거 삼아 내 선택의 품격을 자랑하면 됩니다. 그런데 보라보라나 세이셸 같은 곳으로 결정했다면, 그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에 대한 부연설명이 추가로 필요합니다. 그래도 관광청 홍보자료에 쓰인 해변 사진 몇 개만 보여주면 “우와”, “대박” 같은 감탄사를 쉬이 이끌어낼 수 있기는 합니다. “직항이 없어서 조금 불편하긴 한데, 좋은 곳 가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리고 비즈니스라서 하나도 안 불편해”와 같은 추임새를 곁들이면 금상첨화입니다.


<사진만으로 모든 설명이 가능한 곳 - Seychelles by Didier Baertschiger>


 진부함을 깨고, 남들과 다름에서 만족을 느끼는 커플이라면 카리브해로 진출하면 됩니다. ‘칸쿤엔 한국 신혼부부들이 너무 많아서’라는 전제를 깔고는, 내가 선택한 바베이도스와 아루바, 터크스케이커스 제도가 얼마나 좋은 동네인지를 (그리고 얼마나 비싼 동네인지를) 설파합니다. 미국 부자들이 조세회피처로 사용하는 동네라 물가가 살벌하다는 엄살을 떨며, 그만큼 호화로움의 차원이 다르다 강조합니다. <원 앤 온리>나 <아만> 같은 럭셔리 호텔 체인을 예약한 경우 미리 SNS에 기대감을 표시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 브랜드를 몰라보면 어떡하지?’ 같은 우려가 든다면, ‘조지 클루니가 결혼식을 한 호텔’이라는 설명을 하트 표시와 함께 곁들여주면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켜켜이 쌓인 구성의 모순입니다. 남들 다 했는데 이제서 나만 안 할 수 없습니다. 결혼식장만큼, 신혼여행도 내가 얼마나 결혼을 잘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어버린 마당에 대충 준비하는 건 직무유기입니다. 평생에 단 한 번이고, 결혼 준비에 고생이 많았으니 조금 무리해도 괜찮습니다. 이런 본능에서 자유롭고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아니 애초에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나는 기성의 경쟁적 결혼 문화를 온몸으로 거부할 거야!’라는 저항정신으로 신혼여행 자체를 생략하거나, 한국의 관광수지 적자를 걱정하여 온양온천이나 경주를 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꼭 그래야만 할까요? 나의 반소비주의적 정서를 상대에게 강요하는 건 폭력입니다. 로맨틱한 신혼여행은 모든 신랑과 신부 모두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잖아요.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 by David Hockney>


 과시적 욕구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했다면, 이젠 신혼여행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노력합시다. 가용 예산을 극대화하기 위해 스타일러나 로봇청소기 같은 혼수가전의 일부는 일단 포기합니다. 무엇보다 축의금이 도움이 많이 될 테니, 최후까지 인간관계를 끌어올리기 위해 힘씁니다. 여행을 위해 아기자기한 소품을 준비하고, 예쁜 사진을 위한 세련된 옷도 장만합니다. 유산소와 근력운동을 병행하며 탄탄한 복근도 마련해야겠죠. 그렇게 선택한 최고의 신혼여행지에서, 이제 행복한 신혼부부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면 됩니다. 바다 사진, 음식 사진, 수영장 사진 말고 ‘신랑’, ‘신부’, 그리고 ‘신혼부부’의 사진을 남깁시다. 비싼 여행지를 선택했음을 통해 ‘내 경제력의 크기’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랑의 크기’를 뽐내는 겁니다.




 만약 이런 신혼여행을 잘 해낼 자신이 없다면 여기 다른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모든 힘을 빼고 원점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남들과 같을 필요 없다. 내가 좋으면 좋은 거다’라는 생각을 주기도문처럼 외워봅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원효대사 해골물도 떠올립니다. 다른 사람 훈수는 잊고,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생각합니다. 리조트에서의 휴식도, 올-인클루시브 호텔에서의 먹고 마심도, 미국 국립공원 트레킹도 모두 좋습니다. 이집트 피라미드, 캐나다 오로라, 아니 중국 만리장성이면 또 어떤가요. 다 괜찮지 않을까요? 내 신혼여행이잖아요. 제 경우, 바로 이 고민의 끝에서 조금 특이한 신혼여행을 떠올렸습니다.


<신혼여행보다 더 로맨틱했던 피크닉 - Amandari, Ubud, Bali>


 주변의 관심이 컸습니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에 돈 쓰길 주저하지 않았고, 과시를 많이 하고 살았기에, 사람들은 제 신혼여행지가 어디일지 기대했습니다. 여행지 선정에 부담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뉴욕과 파리에서 20대를 보내고 여행도 많이 다닌 그녀였기에, 역시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손쉽게 합의했습니다. 우리가 자주 놀러 갔었고, 가장 즐거웠던 곳으로 가자.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신혼여행이니 뭔가 특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신혼여행을 떠올렸습니다. 친구 6명에게 의사를 물었습니다. 우리의 신혼여행에 함께 하겠냐고 말이죠. 그들의 흔쾌한 동의와 함께, 우리 8명은 결혼식이 끝난 후 다 같이 오사카로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도톤보리에서 닭꼬치와 생맥주를 손에 쥐고 떠들었고, 돈키호테에서 클렌징 폼과 동전파스를 사느라 과소비를 했습니다. 라멘으로 해장하고, 숙소 앞 세븐일레븐을 수십 번씩 들락거렸죠. 별거 없이 놀고먹은 여행이었지만, 분명 신혼여행이었고, 보기 힘든 특별한 여행이었습니다. 요즘도 제가 신혼여행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은 농담하지 말라며 재차 물어옵니다. 미간을 좁히며 ‘도대체 왜?’라고 묻는 분도 있어요. 저는 긴 말 없이 그저 ‘재밌었는걸요’라고만 대답합니다. 물론 아쉬움과 후회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다시 선택한다 해도 별 수 없이 오사카를 고를 것 같습니다. 아! 오사카 신혼여행 이후 아내와 한 모든 여행이 신혼여행보다 매번 더 로맨틱함은 확실한 순기능입니다. 네, 이렇게 저는 오사카로 신혼여행을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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