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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Aug 11. 2024

혼돈 시대의 심오한 서재 정리법

시간 있으면 나 좀 읽어줘

우리는 혼돈이라는 파도를 타고 있다. 세계는 예측 불가능하다.     


루디 러커가 한 말이다. 그런데 루디 러커가 누구지? 기억나지 않는다. 오래전에 중고 서점에서 이 사람이 쓴 어떤 사변적인 책을 사서 서재에 가져온 일이 있었다. 조금 읽다가 그만두었다. 그러므로 솔직히 루디 러커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위에 인용한 문구만 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메모 카드에 적어 두었으니 말이다. 루디 러커의 문장 바로 아래에는 내가 멋지게 휘갈겨 쓴 나의 생활 철학이 투박하게 적혀있다.     

... ...

가정과 서재에도 혼돈의 파도가 있다. 

아내는 항상 예측 불가능하고 책들은 내 마음처럼 늘 표류한다 - 나.     


책들이 표류하다니? 아, 맞다. 내 서재에서 책들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고 늘 이리저리 방랑자처럼 돌아다닌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책을 빨리 찾지 못할 때가 많다. 결국 독서해야 할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다.      


책의 표류를 막고 독서 시간을 늘리기 위해 서재의 책 배열을 다시 하기로 했다. 솔직히 그동안 문제가 많은 서재였다. 책을 제목에 따라 가나다순으로 정리하는 걸 검토했다. 그런데 이건 의외로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정리 방법이란 걸 이내 알 수 있었다.      


홍희정1) 작가의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옆에 <시간의 화살>이 나란히 놓여 있다면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홍 작가가 알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시간 있으면 자기 좀 좋아해 달라는데, 시간의 화살이 바로 옆에서 휙 날아와 저편으로 쓩 멀어지다니! 좋아할 틈도 없을 테고, 결국 깊은 실연의 고통에 잠기고 말 것이다. 김지숙2) 작가의 <비밀노트> 옆에 <비밀은 없다>라는 DVD가 폼잡고 서 있는 것도 정신건강에 무척 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녀가 애써 자신의 비밀을 노트에 적었는데, 그 옆에 어떤 인간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하고 크게 외친다면, 정말 미울 것 같다.     


게다가 이 배치법의 치명적인 결함은 시간이 있으면 서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서로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마” 항에 있어야 할 책이 혼돈의 파도를 타고 “하” 항에서 정박하고 있는 경우 등 종잡을 수 없는 사건사고가 자주 발생할 것이다. 매번 책들을 추적하여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나의 소중한 주말 오후를 허비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가나다순으로 배치하는 무개념 정리법을 단호히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작가별로 책을 정리하는 게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도 있다. 하지만 그건 최악의 정리법 가운데 하나이다.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작가들 상호 간의 교류가 전혀 없는 일종의 봉쇄 정책이기 때문이다. 같은 인종끼리 한 동네에 몰아넣고 끼리끼리 살라고 하는 건 인류 발전을 크게 저해하는 짓이다. 게다가 눈에 잘 보이는 좋은 자리를 차지한 작가들과 맨 아래 자리에 기거하는 슬픈 작가들 사이에 심각한 계층갈등과 인종차별 등의 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작가차별도 인종차별의 하나임.)     


결국 새롭고 개선된 좋은 서재 정리법 중 하나는, 

흠… 책을 키 크기 순서로 정리하는 것이다! 

일차로 크기 순서로 모으고 이차로 비슷한 두께끼리 정렬하는… 이 방식은 전복적이고 신선하다! ㅎ  


과연, 이 방법으로 정리하니, 서재가 가지런하고 깔끔해 보이고 삶의 불확실성이 단숨에 사라지는 느낌이다. 혼돈의 파도가 몰려와도 굳세게 서로의 손을 잡고 버티는 책들의 장벽이 든든하게만 느껴진다. 홍희정 작가의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옆에 키가 비슷한 우테 요르크의 <넌 날 미치게 해!>가 다정하게 자리 잡은 모습은 뜻밖에 흐뭇하다. 두 제목을 읽으니 아이러니한 분위기도 연출된다. 섬세한 독자라면 당장 두 책을 비교하며 읽고 싶어질 것이다. 게다가 두 작가는 서로 잘 통할 것 같다. 하나는 소심하고 하나는 극심하므로.    


키 크기와 두께가 비슷한 책끼리 나란히 배치하는 서재 정리법, 매우 신선하다! 

     

정리 시간이 모자라 남게 된 책들은 랜덤 모드로 정리하는 방법을 권장한다. 이것 역시 매우 효과적이다. 책들을 일단 서가에 대충 몰아 넣는다. 다 읽은 책은 적당히 아무 곳에나 틈새가 보이는 곳에 곧바로 꽂아 넣는 방식이다. 이 방식으로 얼마의 시간이 흘러가면, 삐삐 롱스타킹의 뒤죽박죽 별장에서 책들과 함께 지내는 것처럼 즐거운 인생이 된다.      


김지숙 작가의 <비밀노트> 왼쪽에 우연히 랜덤하게 자리 잡은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을 보라. 창조적 영감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여학생의 비밀스러운 우정과 마음의 상처를 기록한 것과 미국 국방성에서 수행한 염소를 노려보는 기밀 프로젝트 문서라니! 여학생의 마음과 국방성의 임무 중 과연 어느 것이 더 인류 역사 발전에 중요한 문제일지 숙고할 기회도 선사한다. 이런 철학적 주제를 품은 스릴러 소설의 착상이 절로 떠오를 것만 같다. 한편 <비밀노트> 오른쪽에는 우연히도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까발리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가 차분히 자리 잡고 있다. 비밀노트를 읽다가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다가 다시 비밀노트를 읽다가 염소를 노려보다가, 해보라. 복잡한 사회의 부조리와 내밀한 인간의 심연을 동시에 들여다보는 우주의 신이 된 기분과 함께 초신비한 통찰력이 가득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된다. 믿거나 말거나. 3) 


   

랜덤 모드 정리법 - 비밀노트를 읽다가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다가 다시 비밀노트를 읽다가 염소를 노려보다가, 해보라.



1) 홍희정,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우유의식」으로 등단, 2013년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 
2) 김지숙, 2009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에 「스미스」로 등단, 『비밀노트』 외 다수의 청소년 소설 발표 
 

3) 제 서재는 최근 대략 장르 별로 정리되고 장르 내에서 키크기와 랜덤모드로 재배치됨을 쓸모없이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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