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anXpaper Aug 30. 2024

옛날이야기

아래는 아주 오래전 신변잡기 등의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쓴 것이다. 
그 당시 <월간 에세이>라는 잡지에 독자투고 했는데 
채택되어 책에 실리고 1년 정기구독권도 받았다.
내가 쓴 글이 활자로 인쇄된 것을 보고 무척 신기했었다. 
한승원 작가님의 도움말도 있었는데, 글 쓰고 싶은 마음이 큰 격려를 받았다.  

         

옛날이야기          



   옛날 옛날에…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아득히 먼 어린 시절에, 하루는 외할머니가 집에 오셨습니다. 그날부터 할머니는 우리 가족과 함께 사셨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할머니는 시골에서 혼자 외로우셨던 모양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노년을 저의 어머니와 함께 보내고 싶으셨던 거죠. 외손주인 저와 여동생들의 재롱도 보고 싶으셨을 테고요. 그래서 그 당시 우리가 살던 김포까지 홀연히 올라오셨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 어머니께서 외로운 할머니를 애써 모셔왔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세한 내막은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그저 어느 날부터 할머니가 밥상에 앉으셔서 저와 동생들에게 밥을 떠먹여 주시곤 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 저는 이미 혼자 밥을 먹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귀여운 손자에게 밥과 반찬을 직접 챙겨주시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며칠 후, 할머니가 연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대나무를 갈라 곱게 엮은 다음, 풀을 잔뜩 먹인 창호지를 발라 매끈한 방패연을 만드셨습니다. 기다란 연 꼬리가 힘차게 바람에 펄럭였습니다. 저는 그걸 들고 뛰어나가 친구들에게 자랑했습니다. 연을 공중을 휙 띄운 뒤에 동네 어귀를 열심히 달리며 연줄을 풀었습니다. 그렇게 서너 번 시도한 끝에 연을 하늘 높이 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건 정말 굉장한 일이었죠. 마치 제가 연과 함께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으니까요. 


    그 무렵에 우리 동네에서 연날리기가 최고 인기 놀이로 등장했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어디선가 연을 만들어 왔습니다. 아마 친구들에게도 연을 만들어 주시는 할머니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언덕과 들판에 모여 연을 날렸습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연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연끼리 접촉시켜 상대방 연줄을 먼저 끊어버리면 이기는 싸움이었죠. 저보다 덩치가 두 배나 튼 동네 형이 제 연에 싸움을 붙여왔습니다. 피하려고 했으나 눈 깜짝할 사이에 연줄이 서로 꼬였습니다. 날카로운 사기그릇 조각을 품은 그 형의 연줄은 단숨에 제 연을 끊어버렸습니다. 연은 공중에서 맥없이 휘청거리며 빙글빙글 돌더니 그만 멀리 사라졌습니다. 어린 저는 연을 되찾을 생각은 못 하고 억울한 마음에 울음만 터트리며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할머니 품에 안겨 엉엉 울었습니다.      


   “애야, 연이 어디로 갔니?”저를 달래던 할머니가 물었습니다. 

   “저쪽 하늘이요.”     


   할머니는 제가 막연히 가리킨 하늘 한 구석을 바라보시더니 잃어버린 연을 찾으러 나가셨습니다. 저는 혼자 훌쩍거리며 기다렸습니다. 한참 뒤에 할머니가 환히 웃으시며 줄 끊긴 연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산 너머 아주 멀리 날아가버린 줄만 알았던 연을 다시 찾아 정성껏 손질해 주셨습니다. 할머니의 고무신과 치마엔 흙이 잔뜩 묻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때 연을 찾으러 얼마나 멀리 가셨던 걸까요?     


    할머니가 제게 밥을 떠먹여 주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그게 점점 더 싫어졌습니다. 마침내 고개를 돌리며, 혼자 먹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할머니가 입댄 숟가락은 싫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어머니가 철없는 저를 오랫동안 혼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저 웃기만 하셨습니다. 손자의 밥상 독립선언(?)을 인정하시곤, 더 이상 제게 밥을 억지로 떠먹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얘야, 꼭꼭 씹어 먹어라”라는 말씀만 하셨죠.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저는 누워 계신 할머니의 팔다리를 자주 주물러 드렸습니다. 할머니가 빨리 나으셔야 옛날이야기를 또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할머니의 병환은 날로 깊어만 갔습니다. 어머니가 할머니 대소변을 봐주셔야 할 정도가 되었으니까요. 더 이상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듣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저는 슬그머니 할머니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왔습니다. 새 학기에 적응해 가던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그날, 저는 학교에서 놀다가 조금 늦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안에 많은 사람이 북적대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일까? 어머니가 크게 우시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옆집 아주머니가 저를 한쪽으로 데려가더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멍해졌습니다. 할머니가 영영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걸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를 다시 볼 수 없다니….     


   저는 사람들이 없는 뒤뜰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서 책가방을 등에 멘 채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혼자 울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새 저도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할머니처럼 멋진 연을 만들 줄 모릅니다. 할머니가 해주신 꿀떡처럼 맛있는 옛날이야기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이따금 딸애의 동화책에서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발견하곤 합니다.      


   하루는 가족과 함께 한강 공원에 갔습니다. 강변 매점에서 연을 파는 걸 보고 딸에게 하나 사주었습니다. 딸애는 어린 시절의 저처럼 연을 띄우기 위해 강변을 신나게 달렸습니다. 갑자기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연이 그리워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강변 높이 떠 있는 흰 연들을 바라보다가, 가족이란 언젠가는 서로 헤어져야 할 운명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치 줄 끊긴 연이 먼 곳으로 사라지듯 말입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저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깊고 넓은 할머니의 사람은 여전히 강물처럼 고요히 제 가슴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연을 든 딸애가 멀리서 달려왔습니다. 어린 시절 추억이 어우러져 달려왔습니다. 그 시절은 어디로 간 걸까요. 갑자기 환하게 웃으시는 할머니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습니다.      


   “얘야, 연이 어디로 갔니?”          





한승원 작가 도움말

할머니의 이야기와 지금의 나와 내 딸의 이야기가 맞물려 있어서 좋다. 이렇게 과거 시간은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의미 있게 뻗어가야 한다. “애야, 연이 어디로 갔지?”하는 끝마무리의 말이 많은 여운을 남긴다. 



사진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 날리기 


작가의 이전글 죽음에 대하여, 별 쓸모없는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