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노벨상을 못 받는 결정적인 이유가 이것입니다. 쓸데없는 일을 거듭하는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과학이 가르쳐준 것들-
토론이든 토의든 본인이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닌 이상 적극적으로 참여하기가 어렵다. 교실에서 토의/토론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맞닥뜨리는 첫 번째 난관이다. 지나치게 가벼운 주제로, 예를 들면 여름이 좋아 가을이 좋아 같은 선호를 묻는 논제나 밸런스 게임으로 동기유발하는 것도 한순간이다. 사회에 닥친 현안이나 교실/교내의 문제를 다루려는 순간, 분위기는 식고 참여가 저조하다. 관심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난관 다음은 두 번째가 오기 마련이나 그다음은 없다. 난관 직전의 더 큰 고비가 있을 뿐. 다른 학교나 학생 혹은 학원은 어떨지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로는 대한민국 교실에서 유의미한 '자유 발언'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정답이 없고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고 해도 또래 눈치 보기 바쁘다. 택도 없는 소리를 한다거나 자기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순간 빗발치는 원성, 특히 올해는 정도가 도를 넘었다.
"원숭이가 말을 하네."
"뭐래."
"(비웃음)/(조소)"
특별히 이상한 말을 내뱉은 것도 안니다. 허무맹랑한 얘기라고 할지라도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몇몇 비아냥대는 학생이 한마디를 거들고 뒤이어 야유가 깃든 웃음소리를 듣고 나면 그 누구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학생들만 붙잡고 물어보고 싶다.
"Who hurts you?"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13살도 안 된 애가 다른 사람 의견을 무시하는 행동과 태도를 먼저 배웠을까. 내가 아는 한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즉, 다 큰 어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가정이든 학교든 뉴스든 인터넷이든, 여기 까지라는 소리다.
'최재천'의 '숙론'은 대한민국 온 국민이 머리를 싸매고 함께 고민했음 싶은 논제를 담은 책이다. 그에 곁들여 저자의 생각이 적혀 있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의 의견에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더랬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라며 읽어나가다 책을 덮은 순간 허무해졌다. 아무래도 대한민국 정부든 국회의원이든 심지어 국민이든 딱히 숙론에는 관심이 없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소수의 사람이 아무리 떠들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거란 불길한 예감이다. 현생 살기 바쁜 국민들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가 아닌 이상 관심이 없어 보인다. 위에 앉은 분들은 싸우느라 바쁘다.
'이정모'의 '과학이 가르쳐준 것들'은 상대적으로 재치 있는 책이었다. 머리말에서 밝혔듯 과학적인 내용이 아니라 과학 하며 저자가 느꼈던 바들이 적혀 있다. 운명이었던 건지 두 책을 연달아 읽었는데 다소 비슷한 부분이 있어 보였다. 우리 실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쟁점을 과학자의 시선으로 풀어냈다는 점이 그랬다. '숙론'이 본격적으로 무거운 주제라면 '과학이 가르쳐준 것들'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주제였다.
그 차이가 무엇이 됐든 두 책을 연달아 읽으며 발견한 공통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그러니까 영향력 있는 두 과학자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할 수 있겠다(아닐 수도 있다). 우리에게 정녕 필요한 건 대화였다고, 서로의 말을 들어주고 내 의견을 전달하는 정상적인 언어활동이 간절했다고. '이정모' 씨는 이렇게 얘기했다. 인간은 서로 대화할 수 없는 존재라고 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한 거라고. 이렇게 마친 문장 뒤에 말줄임표가 있을 것만 같았다. 줄여진 말은 다음과 같지 않을까. 그렇기에 더욱 대화에 매진해야 한다고. '최재천' 씨는 책 제목부터 '숙론'이다. 토론/토의의 중요성을 대학생 때부터 느꼈다고 저술했다.
그렇다면 정작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부모님의 혹은 나와 의견이 좀 다른 친구의. 대게 의견 차이가 좀 있다 싶으면 내가 보이는 가장 첫 반응은 '공격'이다. 내 의견에 동조시키기 위해 상대의 논점이 얼마나 허술한지 공격한다. 논쟁이 끝나고 나면 허무하다. 사실 나도 알고 있다. 인간의 생각을 바꾼다고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러니 내게 필요한 건 '공격'이 아니라 '여운'이었을 수 있겠다. 다소 날카로운 언행을 접어두고 경청한 뒤에 그들이 내 의견을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여운을 남기는 것. 그것만 해도 성공적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