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하고 옹졸하기만 했다. 누군가 일상에 잠시 스쳤다기에도 모자라게 지나쳤는데 갖은 의미 부여를 하고 설렌 대가가 그리도 초라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한동안 꽤 헛헛했다. 그런 대화가 오갔음에도, 나의 당황을 다 알았을 거면서 완전히 끊어주지 않는 그 연락에 한껏 휘둘리는 순간 내내.
그런 선을 그어놓은 사람에게 더 희망 따위 가질 리 없었다. 곰곰 곱씹어보니 나 역시 아니다 싶은 사람에게, 혹은 마음이 덜 기우는 사람에게 그래왔던 듯했다. 여지 주지 않으려고 연락을 안 한 경우는 허다했고 아예 말로 못 박은 경우도 많았다. 그랬으니 그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없었다.
그냥 내가 그 정도 선의 별거 아닌 사람이겠거니, 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엇나가고 기우뚱했던 순간의 감정은 살며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폭풍우도 아니고 봄바람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날 어느 순간에 기억도 못 할 바람 한 점쯤으로 여기고 받아들이면 됐다.
하지만 원래 말이 쉬운 법이다. 사람 마음이 종이학 접듯이 쉽게 뚝딱 접히는 게 아니라서 괴롭고 거슬렸다.
괴로운 건 알겠다만 거슬린다는 것에 의아하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때 그와의 그 ‘의미 부여’ 대화 이후로 연락을 안 하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겠거니 했다. 내심 이제 부담스러움에 그가 연락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역지사지로 생각해 나라면 그럴 거 같았다. 하지만 그의 속을 생판 남인 내가 어찌 다 알까.
만일 내가 이십 대 후반의 싱글 여자인데 삼십 대 중반을 향해 가는 이혼 경력이 있는 데다가 아이를 기르는 남자가 좋다고 헤실댄다면 높은 확률로 고개를 저었을 거다.
그러니 그 입장에서 아무래도 애 딸린 돌싱은 어렵지. 이 아줌마가 선 넘네.라는 속내를 지녔을 수도 있다. 사실 이조차 그저 자격지심 가득한 나의 추측일 뿐이다.
그런데 참 의아하게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무 일도 없단 듯이 연락을 이어갔다. 이게 내내 거슬리는 부분이었다. 핸드폰만 잡고 살 정도는 아니고 드문드문. 별다를 거 없이 흔해 빠진 무용한 것들을 묻고 간간이 둘 다 좋아하던 영화의 이야기나 주변 이야기를 전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감이 떨어질 때로 떨어진 나는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대체 뭘까?라는 의문에 휩싸여 지냈다. 그 어느 것도 섣부르게 짐작해서는 안 됐고 무턱대고 먼저 끊어내기도 망설여졌다.
상대를 떠보기만 했지 진지하고 진득하게 진심을 터놓은 게 아니었다. 그저 ‘아는 사이’에서 ‘의미 부여’를 해버린 나만 있을 뿐이지 그의 잘못은 없었다. 마음 상했다고 매몰찰 명분이 뚜렷하지 않은 기분이랄까. 석연찮은 찝찝함은 나만의 몫이었지 그의 것이 아닌 상태이니 말이다.
그저 아는 사람, 친구로 지내고픈 마음일 지도 모르는데 ‘나 좋아하지도 않는데 됐거든?’ 하는 유치함으로 응대하긴 쪽팔리다고 생각했다.
한참 생각해 내린 결정은, 어디까지 어떻게 하나 두고 보자, 였다.
‘될 대로 되라지, 시간이 알아서 매듭지어 주지 않을까. 될 거면 진즉 뭐든 됐겠지만 인간관계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내 마음이 추슬러지는 어느 지점이 오면 어쩌면 정말 편안하고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않으려나?’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자상함에 가둬진 채 그렇게 한껏 흐릿해졌다.
그렇게라도 지지부진하게 남고 싶은 마음은 대체 왜. 정말 대체 왜. 뭔데 피어올라서 사람을 끝까지 바보로 만드는지 모른다. 좋다고 휘저어지고 흔들리고 헤헤거리는 모자란 나를 인지하는 건 무척 고통스럽고 낯선 경험이었다. 내가 나를 모른 척 흐린 눈 하며 빛 좋은 개살구를 찾는 게 바로 그런 순간이지 않을까 싶다.
더 솔직해지자면 별 영양가 없는 그의 연락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나란 인간은 텀을 두고 답장을 하는 것 따위엔 애초에 재능이 없었다. 게다라 그런 걸 밀당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애초부터 밀당할 동등한 마음의 무게가 아니었다. 내 쪽이 더 묵직하게 마음이 무거웠으니 시야가 같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아니 근데 시발 대체 왜. 더 좋아하는 사람이 을이 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쌍방의 사랑이든 짝사랑이든 뭐든 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다 한들, 그런 사이에도 공평함이라는 게 있어야 하지 않나?
더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 마음이 큰 사람이 더 우위에서 여유로우면 좀 좋겠냐고. 왜 더 좋아할수록 을이 되어 위축되고 빌빌대야 하는지 영 짜증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도무지 그를 미뤄둘 수가 없었다. 중요한 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한 줄 한 줄 모든 것이 다 반가웠고 기뻤다.
그는 나 같지 않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정도쯤부터는 온전히 나 좋자고 책임감 없이 마음을 키웠던 거다. 그렇다는 건 칼을 쥐고 있는데 손잡이가 아니라 날을 쥐고 있다는 거다. 휘젓고 휘둘러 봤자 나부끼는 건 둔탁한 칼 손잡이, 파고들어 아픈 건 쥐고 있는 나였다. 그렇게 모자라게 구는 반푼이같이. 미련하게 그러고 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 못한 순간에 과거의 어느 한 장면이 떠오를 때가 있다. 만화 장면처럼 퍼뜩! 하는 무언가가 반짝이며 각성되기라도 하듯 어느 지점이 생생해지는 순간. 맞다 그때! 하면서 입이 떡 벌어지는 때 말이다.
할 거 하면서 살고 있다 우기지만 실은 핸드폰만 쳐다보며 마음 졸이고 있던 때, 내게 답장은 하지 않으면서 새로 올라온 그의 인스타 스토리 같은 거에 입술을 잘근잘근 할 때, 그렇게 오래전 어느 한순간이 떠올랐다.
“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어디 이혼이 쉬운 줄 아니? 이러고 너 혼자되면 있잖아, 쉽게 보고 쉽게 생각하는 것들이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막 들러붙어. 네가 어떻게 살건 갔다 온 여자? 희롱하기 좋은 대상이라고. 넌 아니지? 아니라고 백날 하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근데 지들이 뭐라고 그렇게 보더라. 그런 데에 휘둘릴 생각 말아.”
이혼이 결정되던 시기에 존경해마지 않던 선배에게 이런 소리를 들었었다. 선배 역시 다녀왔고 상처가 깊었다. 내 어린 시절부터 모든 걸 지켜본 그녀는 나를 몹시나 딱해했다.
스스로 파란만장하다고 여겼는데 감히 비비지도 못할 사연을 지닌 선배는 멍하니 넋 나간 내 앞에서 눈이 새빨개져가며 목소리를 높였었다. 울 힘도 없는 나 대신 눈물 그렁그렁 맺혀가며 한스러운 듯이 토해내던 목소리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생생하게 가시처럼 날아와 핸드폰을 만지작대는 손등에 박히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원래 지닌 그의 성품과 성향, 대체 나에 대한 의도가 무언지 일일이 다 알 수 없지만, 속단할 수는 없다만. 귓등으로 흘릴 조언이 아닌 기분에 얼떨떨해졌다.
그때 그 선배의 말이 왜 그리도 선명하고 크게 맴돌았는지. 정말이지 희한한 노릇이었다. 난데없이 과거의 어느 순간에서 답 비슷한 걸 찾은 것 같아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도 미적지근하게 이리저리 끌면서 그 어느 확신도 주지 않는 이유를 알 듯했다. 난 그에게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확인 사살을 기어코 그리 기특하게 셀프로 해내버렸다.
이제 그에게 일말의 기대와 희망도 걸지 않아야 한다는 맺음을 직감했다. 막다른 벽이 눈앞에 쾅하고 내다 꽂혀 막힌 기분이었다. 어쩌면, 아니 높은 확률로 현실을 자각해버린 막막함과 배신감은 그렇게 높다랬다.
그냥 심심하고 외로운데 더 가까워지는 건 저어 되는 딱 그만큼의 감정. 거기에 신명 나게 휘둘리는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만약의 만약으로 그게 그의 진심이 아니라 해도 말이다.
그리고 진심이 조금이나마 있었다면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그것까지 다 알고 있었다.
대체 나란 년이 지닌 심상의 흐름이 왜 그 따위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리하여 나는 마음을 먹어 버렸다. 이왕이면 초라하고 옹색하고 볼품없이. 내가 지녀왔던 마음을 고백하기로 말이다. 떠올리면 수치스럽고 쪽팔림이 솟구쳐 더 어찌 기다리거나 해보고 싶은 생각도 안 들게. 지지부진하게 붙든 여지를 내 손으로 내가 끊어내고 다시 안 볼 책처럼 야무지게 덮고 말리라. 그리하여 더 휘둘리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렇다는 건 그렇게야 털어지겠다, 싶을 정도로 나는 그에게 그리도 많이 마음을 쓰고 있단 뜻이었다.
꼬리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이 될지라도 이 지지부진한 감정 놀이를 끝내고 싶었다. 물 한 방울 떨어지길 기다리며 퍼석퍼석 더 시들어가기 전에. 달리 더 깊이 아프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