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테스트를 하다가 우연하게 저런 질문과 마주했다. 새삼스럽게 언제가 가장 행복하냐니. 심드렁한 내 앞에 테스트는 맑게 갠 아침과 하루를 끝마친 시간을 선택지로 내밀었다. 활기와 피곤이 뒤섞인 점심시간도 있을 거고, 식곤증으로 나른하게 잠이 밀려오는 오후와 노을이 눈물겨운 초저녁도 있는데 심리테스트의 이분법에 죄다 선택받지 못했다.
어쨌든 그 두 가지 보기밖에 없었기에 별 고민 없이 잠이 들기 직전의 밤을 꼽았다.
누가 시작보다 끝이 더 마음 편해지면, 그만큼 설렘보다 안도가 더 중요한 때가 오면 나이 먹은 거라고 그랬었는데. 그래서 이제 나이 먹었다 치고 마음 편하고 덜 설레는 게 좋아지는 때가 됐나 보다, 해버렸다.
진정 그 시간이 가장 편안하고 후련했다. 어쨌거나 하루가 이렇게 저물어가는구나, 하는 큰 짐 하나가 덜어지면 숨이 쉬어지니까. 잠과 함께 어중이떠중이의평온이 밀려오는 시간이 외려 내겐 가장 생동감이 있는 시간이었다. 이불의 폭닥함이 몸을 감싸고 공기 중으로 다 흩어지지 않은 샴푸 향이 기분 좋게 코끝에 감도는 때.
완벽한 하루는 아니었고 더러 인상을 찌푸리고 피곤하기도 했으며 여기저기 시달렸다 해도 말이다. 그래도 어쨌든 간에 얼렁뚱땅 이나마 하루를 버티고 보냈다는 위안이 절로 샘솟는 시간이니 가장 행복하다.
내일 걱정은 내일모레 하라는 노래 가사도 있는데. 까짓 거 오늘도 버텼는데 내일도 못 버틸까. 불쑥 다 지니지 못한 배짱 같은 것도 잠꼬대처럼 되새기다가 보면 ‘엄마.’ 하고 옆자리에 누운 아이가 다리를 턱 올리며 안겨 온다. 어쩐지 보들보들한 향내와 아직 아기 같은 살결이 한 이불 아래 녹아들면 뜨거운 코코아 속의 마시멜로가 된 기분이 들어 버린다. 달고 따뜻하고 아까울 정도로 소중한 시간. 아직 우리의 창밖은 화려하고 소란스럽다만 세상 모든 고요와 평화가 퀸사이즈 매트리스 위에 차려진 기분에 포만감까지 느껴진다. 그러다 한겨울에도 땀이 맺힐 정도로 깊이 잠든 아이가 새근새근 시큰한 숨소리까지 내면 그 짧고도 긴 순간이 영원하길. 조용히 행복을 만끽하며 바라다 잠이 든다.
심심하고 처절하게 버텨내는 많은 날에 아이는 여름날 파도같이 무기력함을 깨운다. 잊고 있던 바다와 마주한 순간 발등과 발목에 작은 파도가 찰싹, 하고 들러붙는 청량한 느낌. 어쩐지 잠겨 들려할 때마다 아이는 가슴께에 부딪히는 파도가 되어 간질인다. 그러면 웃음이 핀다. 심장 근처에 파랗고 하얀 물이 드는 기분이 들면서 숨이 트인다.
혼자라면 이 퍽퍽한 삶을 버텨냈을까.
사랑에 빠지면 무채색 평면인 세상이 알록달록 팔레트로 보인다. 이 넓은 세상 속에 기어코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걸 우리는 기적이라고 쉽게도 부른다. 과장도 있겠지만 정말 특별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 와중에 헤어질 수도 있는 사람끼리 굳이 굳이 새 생명까지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수고를 한다. 기적이 낳은 전혀 다른 경이로움. 그렇게 태어난 생명은 과연 뭐라 불러야 맞는 걸까.
아무 계획 없이 눈을 뜬 일요일 아침, 채 가시지 않은 전날 밤의 샴푸 냄새와 달큼한 살냄새를 풍기며 눈을 비비는 아이를 껴안아본다. 그러면 아무래도 지옥 같은 세상의 유일한 천국이 여기일까.
절로 이런 생각을 한다.
방학을 시작해서 뒹굴뒹굴 모처럼의 게으름에 행복해하는 아이와 오래 있자니, 그래 쟤랑 있는 모든 시간이 제일 행복할 때네. 피곤한데 위안이 되는 웃음이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