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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r 27. 2024

들켰다, 그리고 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구!

2024. 3. 24.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내가 애들한테 한 소리 했어. 틀린 것도 당신이 다시 채점 안 했던데? 그거 자꾸 미루면 진짜 하기 싫어진다니까. 그때그때 바로 해줘."


드디어 우리의 불량스러운 행각이 그 양반에게 발각되고야 말았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면서 너무 해이해져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우리 세 멤버는.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 멤버는 살짝 양호했고 두 멤버가 무척이나 느슨한 생활을 해 왔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셈이다.


"당신 정말 너무 한 거 아니야? 이렇게 채점이 밀리면 어떡해?"

그래.

인정한다.

내가 너무 했다.

잘못은 내게 있으니 할 말이 없다.

"당신이 매일 챙겨서 봐줘야지."

그래, 그랬어야 했지.

"이렇게 애들한테 신경 안 쓰면 어떡해?"

그건 오해야.

신경은 쓰고 있었다고, 매일 채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고, 그건 오해라고, 이건 이거고 저건 저것이 아니냐고 되받아치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게 말했다가는

"말은 잘하네."

라는 핀잔의 말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적어도 나는, 나서야 할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를 안다.(고 나만 생각한다)

죄인은 일단 자숙기간을 얼마간 가져야 했으므로.

섣불리 반항했다가는 오히려 일을 그르칠 테니까.

"앞으로 신경 좀 써줘."

못 미더워하면서도, 그 양반은 내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다시 줬다.(고 나만 믿었다)


"엄마, 아빠가 다 알아버렸어. 아까 우리 문제집 검사했어."

어쩐지, 시장 갔다 오니까 집안 분위기가 쎄~하더라니...

딸 방에서 남매는 뭔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은 필시 밀린 문제집 덩어리였을 것이다.

"그래?"

기원전 1억 년 경에 이런 날이 기필코 오고야 말 것이라고 막연히 예상해 왔으므로 나는 크게 놀랍지도 않았다.

게다가 우리 세 멤버는 공범(?)이었다.

알면서도 눈 감아 주고 슬쩍 모른 척해 주면서 암암리에 안이한 생활을 이어 온 사이였다, 우리 세 사람은.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한 배를 탔다'라고 한다지 아마?

물론 그 배에 어린 두 멤버를 태운 이는 단연 나였다.

"얘들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젠 다 해야겠다. 그동안 솔직히 너무 밀려서 엄두가 안 나서 못한 것도 있잖아. 엄마도 바로바로 채점해 주고 했으면 이렇게까지 안 됐을 텐데..."

가장 많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나마 어른인 내가 어린아이들을 다잡아 주고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결국 일을 크게 만들고 말았다.

일요일 아침부터 제 아빠에게 얼마나 훈화 말씀을 들었을꼬?

한 얘기하고 또 하고 우리고 계속 우렸겠지?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안 봐도 비디오'라고 한다지 아마?


일요일 오전 아침 10시부터 저녁 7시가 다 되도록 남매는 딸의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딸이 아들의 틀린 문제들을 바로잡아 주고 있었다.

"간식 줄 거 아니면 방해하지 마요."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남매는 숱한 일탈의 날들에 대한 과보로 일요일 내내 문제집만 들여다봤다.

"얘들아, 계속하면 질리고 능률도 안 올라. 쉬엄쉬엄 해."

"아니야, 엄마, 할 때 해야지 안 그럼 또 하기 싫어져."

우리집 가장 최연소 멤버가 저런 대견한 말씀을 다 하셨다.

"그래도 하루 종일 하면 우리 아들 힘들 텐데."

"괜찮아. 어차피 해야 할 일이잖아."

"그래도 힘들면 쉬기도 하고 해. 알았지?"


"엄마, 드디어 다 끝냈어. 세 과목 밀린 거 다 했어!"

환희심에 넘치는 아들의 말에 나는 대견하면서도 이 모든 사건의 원인 제공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나는 남매의 기특한 행동에 더욱 미안해졌다.

엄마 때문이야, 엄마가 더 신경 썼더라면 너희가 지금 이런 과보를 받지 않았을 텐데...

미안한 마음에 나는 간헐적으로 딸의 방 문을 두드렸다, 물론 남매가 환호할 만한 맛난 간식을 들고서...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그 말, 그건 매일 풀어야 할 문제집을 제 때 풀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양반에게 들키고 만다는 것을, 훈화말씀인지 잔소리 폭탄인지 구분하기 힘든 그것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다짐했다,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지, 그 양반에게 들키지 않도록, 가급적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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