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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02. 2024

엄마의 '기역'

할머니들의 '기역'

2024. 10. 31.

< 사진 임자 = 글임자 >


"허리를 펴라니까."

"안 펴지니까 그러제."

"허리가 왜 안 펴져? 펴면 되지."

"안 펴지는 것을 어쩌겄소?"

"그렇게 구부리고 다니믄 나중에는 아예 못 편다니까 그러네."

"누구는 안 펴고 싶어서 안 피는 줄 아슈?"

"그러니까 펴!"


아닌 게 아니라 내가 보기에도 엄마는 허리가 구부정했다.

아빠는 그걸 또 그냥 못 지나치신 거다.

이건 노화의 문제, 생활 습관의 문제, 고질병의 문제 등등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지 단지 엄마가 허리를 펴고자 하는 의지가 없어서 허리를 펴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닌데 말이다.


"엄마, 근데 저 할머니는 왜 허리가 '기역'이야?"

"왜 그럴까?"

"몰라."

"할머니들이 옛날부터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서 일만 해서 그런 거야. 그렇게 수 십 년 간 일하다 보면 허리가 저렇게 굽을 수도 있어."

"에이, 그게 말이 돼? 일 한다고 저렇게 허리가 굽을 수 있어?"

"진짜라니까. 엄마도 어쩔 때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안 펴지더라. 그리고 펴지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려. 아프기도 하고 그래서 허리가 그냥 구부러진 상태로 걸은 적도 있었어. 아마 저 할머니도 그렇게 살다 보니까 저렇게 굳어버렸을지도 몰라."

"우리 외할머니는 허리가 저렇게 안 생겼잖아."

"응, 저렇게까지는 아니어도 이젠 외할머니도 점점 허리가 구부정해지고 있어."

언젠가 친정 가는 길이었다. 앞에 한 할머니가 정말 허리를 '기역'으로 만든 채로 유모차를 밀고 길을 가고 계셨다. 나야 자주 보던 풍경이니 그러려니 심상하게 봤지만 아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할머니가 왜 그렇게 허리를 구부리고 다니는지 이해가 안 되는 눈치였다.

"근데 엄마, 보니까 할아버지들은 허리가 저렇게 안 생겼는데 왜 할머니들만 그러지?"

"그러게. 할머니들 허리가 더 많이 굽은 것 같긴 하다."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보다 더 일을 많이 했나?"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럼 저 할머니는 잘 때는 어떻게 해? 허리가 안 펴지면 누워서 못 잘 거 아니야?"

"아마 옆으로 누워서 허리가 굽은 채로 그대로 주무시지 않을까? 허리가 안 펴지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 너무 불편하겠다."

"그렇겠지, 아마도."

"어휴, 세상에. 얼마나 일을 많이 했으면..."

노래에도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이라는 가사는 있어도 '꼬부랑 할아버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어린 아들도 난생처음 보는 할머니의 '기역'자 허리에 안타까워하는데 아빠는 엄마한테 왜 그러실까?

"그동안 결혼해서 날마다 고생만 하고 살아서 허리 펼 틈도 없이 일만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소? 홀어머니에 시동생 여섯, 거기다 자식들 넷이나 키우느라 고생 많았네. 맏며느리 노릇 하느라 쉴 틈도 없이 쭈그리고 앉아 일만 하다 보니 이렇게 허리가 굽어 버린 거 내가 다 아네. 시동생들 가르치고 결혼시키고, 자식들 뒷바라지에 30년 동안 시어머니 병치레에 허리 펼 짬도 없이 산 거 내가 모르지 않소."

라고 아빠가 말씀하시며 엄마 허리에 파스라도 한 장 붙여주는 훈훈한 모습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평생 농사일만 하신 분이니 이제 일흔도 넘은 연세니까 허리가 잘 펴지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라고 허리 쫙 펴고 살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나도 가끔 허리가 아프면 똑바로 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아도 마음처럼 되지 않아 어기적 거리며 걷게 될 때가 있다. 하물며 엄마는 어떠시겠는가.

"허리 좀 아프다고 그렇게 구부정하게 다니믄 못써. 그럴수록 더 펴고 다녀야 쓴다고."

"아픈께 그러제, 아픈께."

"아프다고 그러고 다니믄 써? 엄마 봐라, 어떻게 걷는가."

"남은 아프다고 한디 뭔 잔소리가 저라고 많은가 모르겄다."

"그래도 허리를 펴야 된다니까."

"안 펴지는디 어쩌라고!"

"안 펴지기는 왜 안 펴져? 내가 펴 보까?"

급기야 아빠는 엄마를 향해 비장하게 다가가셨다.

그러나 엄마에게 단칼에 거부당하셨음은 물론이다.

"펴고 싶다고 펴지믄 뭣이 성가시겄소? 내가 평생 일만 하고 사느라고 이라고 됐제. 하여튼 느이 아빠는 남의 속도 모르고."


아빠 마음도 이해되고 엄마 마음도 이해된다.

아빠는 엄마가 걱정돼서 그러시는 것일 테고, 아빠 마음은 알지만 뜻대로 안 되는 몸이 답답해서 엄마는 또 그러시는 것일 테지.

다만, 나는 바란다.

엄마 허리가 최대한 '기역'자에 가까워지지 않기를.

아빠가 구부정하게 걷는 엄마에게 지나친 타박은 하지 않기를.

동시에 불현듯 나는 생각났다.

아프면 나만 서럽다는 말.

많이 서러워봤던 나는 절실히 느껴졌다.

아빠는 모르신다.

안 아파 본 사람은 절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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