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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전, 오는 전 (속편)

(또 남편)님의 침묵

by 글임자
2025. 9. 3.

<사진 임자 = 글임자 >


"우리 손주들도 다 오니까 너무 좋다. 고맙다, 며늘아, 고생했다."


어머님은 내가 시가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반기시며 몇 번이고 그 말씀을 하셨다.

하루 안에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고, 어머님 생신이니까 별 일이 없으면 온 가족이 참석하는 것도 좋은 일이니 다 함께 나선 길인데, 평소 못 보던 얼굴들 보며 맛있게 음식 나눠 먹자고 한 일인데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 마음을 다 표현해 주시는 어머님이 나는 또 고마웠다.


"날도 더운데 뭘 이렇게 많이 해 왔어? 조금만 하지."

"다 모였을 때 같이 먹으면 좋잖아요. 근데 어머님, 아무것도 안 하신다더니 또 뭘 이렇게 잔뜩 하셨어요? 어머님 하지 마시라고 제가 해 온 건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 아무것도 안 했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님의 부엌에서 나는 도착하자마자 발견하고야 말았다. 족히 10Kg은 될 법한 고사리나물과 노릇노릇 잘 구워진 생선 바구니가 여러 개인 것을 말이다.

"어머님, 그냥 간단히 먹기로 했잖아요. 근데 왜 또 하셨어요?"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아이고, 저렇게 많이 하시고 아무것도 안 하셨다고 그러세요?"

"저게 뭐가 많냐?"

"무거웠을 텐데 저 고사리 솥은 어떻게 올리셨어요? 너무 무거워서 저도 못 들겠는데요?"

내 말에 어머님은 그냥 웃음만 지어 보이셨다.

정말 고사리나물은 동네잔치를 해도 될 만큼 심하게, 많았다.

"갈 때 너도 가져가면 되지."

"저야 가져가서 먹으면 좋긴 하지만. 아무튼 다음엔 이렇게 많이 하지 마세요."

"그래. 알았다. 알았어."

맨날 어머님은 알았다고 하시고 저러신다.

나도 더위에 밥 해 먹는 일도 귀찮을 판인데 자식들 온다고 음식 준비하시고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날은 덥고 옆에서 누가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 온전히 혼자 다 하셨을 게 아닌가 말이다.

"그냥 간단히 고기나 구워 먹자."

"그래요, 어머님. 근데 무슨 고기를 또 이렇게 많이 사셨어요?"

이것저것 음식 준비하지 말고 더우니까 그냥 '고기나 구워 먹자'라고 하셔서 정말 간단히 그렇게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고기 종류가 한 가지가 아니었다.

돼지고기에 오리고기, 닭고기까지 자그마치 세 가지 종류였다.

"한 가지만 사시지 이렇게 여러 가지를 사셨어요?"

"너희 아버님이 오랜만에 애들 온다고 다 많이 사라고 하시더라."

전에도 이런 일이 있긴 했다.

시부모님은 자식과 손주들 먹일 생각에 뭐든 푸짐하게 장만해 두신다. 집에 갈 때 또 싸 주시려고 더 그러시는 것도 있다.

"갈 때 고기 다 싸 가라."

"네, 잘 먹을게요, 어머님."

뭐든 더 주고 싶어 하시는 어머님은 내가 갈 때마다 절대 빈 손으로 보내는 법이 없으시다.

그래서 나도 그날 아침 새벽에 기상해서 부산을 떨었던 거다.

어머님이 내게 해 주신 거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만 나름 한다고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전복죽을 쑤고, 전날 미리 만들어 둔 도토리묵을 챙기고, 새송이버섯 전, 깻잎 전, 동태 전, 동그랑땡, 나물 등 이것저것 싸다 보니 짐이 네 보따리나 됐다.(내가 5시부터 준비하는 동안 어머님의 자랑스러운 큰 아드님은 쿨쿨 주무시고 9시가 넘어서야 기상하셨다는 점을 느닷없이 꼭 밝히고만 싶다.)


"OO이가 같이 도와줬지? 하긴, 요즘은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거라고 하더라."

둘째 시누이가 말했다.

"네? 도와줘요? 누가요? 누가 같이 해요?"

내 옆에서 그 양반은 말없는 남자가 되었고, 딱히 할 말이 없었는지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갔다.

"엄마, 아빠가 설거지하고 있네."

아들이 부엌에 갔다 오더니 긴급 속보를 전했다.

"그래야지. 당연히 해야지."

어머님을 비롯해 시가 식구들이 만장일치로 그 양반의 행위가 당연함을 인정했다.

"설거지 이거 보통 일 아니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는지 설거지에 팔 걷고 나선 그 양반이 한마디 하셨다.

얼씨구?

그걸 이제야 아셨을까?

그래봤자 한 번이고, 그래봤자 10인분 밖에 안 되는 걸?

나는 시가 오면 최소 10인분을 몇 번이나 설거지하는데 어쩔 땐 이틀 내내 하는데?

설거지 안 해 본 티를 내는 그 양반을 보고 있자니 허술해 보이기 짝이 없어 옆에서 한 소리 했더니 시누이가 말렸다.

"그냥 냅둬. 알아서 하라고."

저기요, 형님,

그게요, 형님 동생이 알아서 못 하거든요. 일일이 가르쳐 줘도 잘 못 하거든요. 모르는 거 가르쳐 주면 말 듣지도 않고 잔소리한다고 타박하거든요. 모르면서 배우려고를 안 해요. 모르니까 가르쳐주는데 듣기 싫어만 하고 남의 말도 절대 안 듣거든요. 제가요, 흉보는 게 아니라 사실만 말하는 거거든요.

내 눈에는 성에 안 차지만 일단은 그냥 두기로 했다.

저러다가 우리가 다 가고 나면 어머님이 다시 설거지하시는 거 아닌가 몰라. 이왕 하는 거 제대로 좀 했으면 좋겠는데 한참 동안 설거지 하던 그 양반은 그새 지쳤는지 살짝 힘든 기색이었다.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러시나.

"설거지 진짜 보통 일 아니네."

할 일을 다 마치고 (굳이) 내 옆에 앉은 그 양반은 또 생색을 내셨다.

유치하지만 나는 또 그에게 몇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새벽부터' 5시간 내내 일한 나보다는 덜 하잖아. 설거지 한 시간도 안 했잖아. 할만하지 뭘 그래?"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본전도 못 찾았다.'라고 한다지 아마?

그 양반의 볼멘소리가 쏙 들어갔다.

사람이 내려다보고 살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야.

아무렴.


가는 전, 오는 설거지.

웬 일로 일방적이지만은 않았던 날,

여전한 무더위 속에서 어머님의 큰아들과 맏며느리는 그날 무사히 하루를 보내고 컴백했다.

5Kg은 될 법한 고사리나물과 어머님의 이바지와 함께.

"내년 우리 엄마 생신 때 간단히 전 몇 가지 할 거지?"

다짜고짜 내가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이렇게나 그 양반은 과묵한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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