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8월 31일의 기록
-답다 ¹
접사
1. ((일부 명사 뒤에 붙어)) ‘성질이 있음’의 뜻을 더하고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 꽃답다.
2. ((일부 명사나 대명사 또는 명사구 뒤에 붙어)) ‘특성이나 자격이 있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너답다.
가끔가다가 우리의 위치에 어울리지 않는 일을 저지를 때 "-답지 않게 왜 그래"하는 핀잔을 종종 듣는다. ○○답다, ○○답지 않다. 사람한테 이야기할 때는 썩 좋은 말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게 작용하는 어휘인 듯하다. "너답네.", "너답지 않네" 양쪽 모두 거북하다. 그래서 가만 생각해보면 그럴 때도 있다. "그래서 정말 나답다는 것이 뭔데?" 하고 의문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분명 생각해보면 우스운 이야기다. 남이 내 특성에 대해 판단하며 이건 네 특성이네 마네 이야기하는 것부터, '나답지 않은 나 자신'에 대해 고민을 하며 '나다운 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자책하는 그 모습도 황당한 꼴이다. 하지만 분명 의미가 있는 그런 부류의 고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올바른 방식을 통해서 했을 때의 이야기다.
"나다움"이라는 그 특성은 내 존재에서 비롯된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방법적 회의론'을 이야기하면서 모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어 존재를 확정 지을 수 없지만, 의심하며 생각하는 자기 자신의 존재만큼은 확실한 존재라고 정의했다. "Cogito Ergo Sum"이라고 하는 흔히들 들어보았을 법한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 대사다. 생각하는 나 자신을 통해 내 존재를 확정 지어서 좋을 것이 무엇이 있을까. 실은 썩 대단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가 확정됨으로 인해 그에 파생되어서 나에 대한 특징이 결정되는 것이다. 내가 있어야 내 특성이 결정이 된다는 말로 이야기한다면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데카르트까지 들먹이면서 어렵게 하다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다.
현대의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라고 칭한다. 라틴어로 된 학명을 번역하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번역된다. 그리고 슬기롭다는 말은 사전적으로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고 일을 잘 처리해내는 재능이 있는 것'이다. 즉,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 데카르트가 말한 생각하는 존재에 대한 확정과 사람의 기본적인 특성이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눈치를 챘어야 한다.
"나다움"은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나다운 것"을 찾지 못해 걱정하는 것도 옳지 않다. "나다움"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충분한 시간과 깊은 생각을 할애하지 않으면 당연하지만 나 자신을 온전히 알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는 주위의 사람들이나 일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만 종종 우리 인생과 항상 붙어 떼려야 뗄 수 없는 나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다. 나 스스로를 의식하지 않으면, 나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없다. 눈으로 보이는 것들은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될 수 있겠지만, 자신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 당연하게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내가 누구인지 고민하는 것이 그리 효율적이지 않아 보일 수 있다. 내가 실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더라도, 남들이 붙여주는 모습의 나도 결국 나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굳이 사서 고생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의 "나다움"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은 굉장히 수고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에게 비쳐지는 내 모습과 내가 받아들이고 느끼는 나 자신의 모습에는 분명 모종의 괴리감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 자신에 대해 조금은 더 생각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평생을 같이 하게 될 사람이니 조금은 더 알아둬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다움"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좀 더 알게 됨으로 인해 나 자신을 더 좋아하게 될 기회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