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쟁을 끝내러 왔다
누구보다 '모호함'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마케팅과 브랜딩 사이의 모호함'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이 둘(마케팅과 브랜딩)은 사용자마다 조금씩 정의가 다르고, 사용 목적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며, 다 떠나서 애초에 정의 자체가 매우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라, 개인마다 어쩔 수 없는 편차가 발생한다. 쉽게 말하면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뜻. 심지어 이 둘은 ‘마케팅이 먼저냐, 브랜딩이 먼저냐’, ‘누가 상위 개념인가.’와 같은 도돌이표의 토론 주제를 야기하는 등 그야말로 ‘관계성’까지 모호한, 대혼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답이 없는 학문’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모습이다.
자연스럽게 한동안 나의 과제는 이 두 개의 영역을 명확히 정의하고 분리해서, 이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모호함을 명확하게 정의하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이 둘은 더 모호해졌다.
마케팅: 잘 파는 것
브랜딩: 구별하는 것
위와 같이 두 용어를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쉽게 정의해 보자. 마케팅의 본질은 '파는 것'이고, 브랜딩의 본질은 '구분하는 것'이다. 자, 그럼 (마케팅은 그렇다 치고) 브랜딩은 '잘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브랜딩 역시 '구분해서 -> 잘 파는 것'까지를 내포하고 있다. 잘 팔기 위해 구분하는 것이지, 구분하기 위해 구분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그러니까 마케팅과 브랜딩은 본질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마케팅: 잘 파는 것
브랜딩: 구별하여 잘 파는 것
이렇게 정리하면 마치 문제가 해결된 듯 보인다. 마케팅에는 대표적으로 <포지셔닝 전략>이라는 것이 있는데, 포지셔닝 전략과 브랜딩은 둘 다 다른 것과 구분 짓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경우 포지셔닝 전략의 일환으로 브랜딩이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브랜딩은 마케팅의 하위 개념이 아닌가?
제법 그럴듯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렇게 무 자르듯 딱 자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위의 도표는 브랜딩의 정의를 오직 '구분하여 잘 파는 것'으로만 특정했을 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브랜딩 개념과 정의는 끊임없이 확장하여, '구분하여 잘 파는 것.'을 넘어섰다. 대표적인 예로 정체성(Identity)이 있다. 얼핏 정체성 역시 다른 것과 구분 짓기 위한 포지셔닝 전략의 수단으로 볼 수 있지만, 정체성은 그 자체로 이미 고유성(절대성)을 내포하고 있다. 다른 것과 100% 일치하는 정체성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체성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에 가깝다. 정체성을 찾았다고 하는 사람은 있어도,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이 정체성(Identity)에는 브랜딩의 목적에 어긋나는 가장 큰 모순이 존재하는데, 브랜드의 정체성은 오히려 매출을 저해하거나 제한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ex. 파타고니아의 사례 등)
정체성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정체성(Identity)은 브랜드가 해야 할 일, 해도 되는 일, 하면 안 되는 일을 정의해 준다. 이 안에 '더 높은 매출과 더 많은 이익'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정체성을 벗어나는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와 같은 '나다움'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브랜딩>은 단순히 매출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존재하는 <마케팅>과 <포지셔닝 전략>의 범주를 넘어섰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제품보다 먼저 브랜드가 탄생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브랜드가 먼저 생기고, 후에 판매할 제품을 선택한다니 웃기지 않은가? 하지만 이제는 흔한 일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마케팅의 영역>이었던 제품 기획, 가격 설정 등이 이제는 <브랜딩의 범주>에 들어갔다면, 마케팅보다도 브랜딩이 최상위 개념이 아닌가?
혹자는 말한다. 브랜딩(본질 및 정체성 확립)이 안 되어있으면 마케팅이 불가능하다고. 뭐 나름 그럴듯한 말이지만, 당연히 그렇지 않다. 브랜딩 관점이 전무한 마케팅 행위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런 이들을 '셀러(Seller, 판매자)'라고 부른다. 브랜딩이 지금처럼 화두가 된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모든 제품과 마케팅이 비슷비슷해진 데서 기인한다.﹣어쨌든 마케팅의 대안책으로 활용되고 있지 않은가. 또 마케팅이 '판매를 유리하게 만드는 모든 행동'이라고 정의된다면, 브랜딩 역시 '모든 행동' 안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그래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고 답답함을 토로할 수 있겠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여전히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이라는 뜻이다. 이 둘의 모호함을 명확하게 정의하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이 둘은 더 모호해진다. 모호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확실한 건 '미정의된 모호함'이 아니라, '정의된 모호함'이라는 것. 즉, 모호한 것이 정답이다.
위에 모든 요소를 고려했을 때, 마케팅과 브랜딩의 관계성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도표는 위와 같다. 둘은 1차원적인 수직/수평의 개념으로 구분할 수 없고, 반드시 교집합 되는 영역이 있다. 그러니 두 단어는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고, 혼용해서 사용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 조금씩 다른 영역의 관점이 섞이는 것 역시 매우 자연스럽고, 한 편으로는 지향해야 할 일이다.
P.S. 아마 저 교집합에 들어가야 할 단어가 있다면, 그건 바로 Business(사업)가 아닐까.
기획자의 시선
프로젝트룸 대표 기획자 노인호의 지극히 개인적인 업계 관찰 & 인사이트 공유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