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에 내려가 있던 외할머니가 이상해지는 것 같다는 소식을 들은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얼마 후 대학교 최종합격을 하고 마음이 가벼웠던 시기에 충동적으로 기차를 타고 보령에 갔다. 전해 들은 소식이 무색하게 할머니는 멀쩡했다.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시장에 가서 쭈꾸미와 조기를 사다 놓을 정도였다. 생선을 싫어하는 내가 유일하게 조기는 먹는다는 걸 할머니는 기억하고 있었다.
외삼촌은 회사에 출근하고 바깥엔 비가 와서 집안이 차분했다. 할머니와 나는 개다리소반에 둘러앉아 느지막한 아침을 먹었다. 간장에 조린 것 같은 쭈꾸미는 간장 말고 뭐가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맛이 좋았다. 바다향이 가득 나던 상은 눅눅해진 김마저 맛있게 느껴지게 했다. 밥을 두 그릇 먹으며 맛있다고 하니 할머니는 다른 것 없고 여기가 바닷가라 그렇다고 했다. 식사 후 설거지를 하려고 하자 할머니는 시집가면 싫어도 실컷 한다고 어디서 나온 힘인지 우악스레 나를 밀치고 기어이 직접 했다.
할머니와 비 오는 논길을 걸어 중앙시장에 갔다. 온 세상에 사람이 하나도 안 보이고 할머니와 나뿐이었다. 할머니가 어떤 건물을 보고 새것이라 멋있다 해서 들어갔다. 보령 문화의전당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기서 할머니와 옛날 옷을 입어보며 놀았다. 몇 년 간 제대로 얼굴도 못 봐서 어색할까 봐 걱정했는데 할머니는 깔깔거리며 즐겁게 놀아주었다. 다시 서울행 기차를 타러 집을 나설 때 늘 꼬장꼬장 강했던 할머니의 눈이 축축한 것을 보았다.
그게 할머니의 멀쩡하던 마지막이었다. 어쩌면 할머니는 내게 마지막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일지도 모른다. 비 오는 보령에서 할머니랑 조금 더 길게 놀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후로 8년, 할머니는 아직 살아있고 아직도 치매에 걸려있다.
초기에는 할머니를 낮동안 데이케어센터에 보내고 남은 시간은 가족들이 틈틈이 돌보았다. 하지만 치매가 더 심해지고 혼자 거동도 힘들어지자 그나마도 못하게 되어 1대 1 보호사를 고용했다. 보호사가 사소한 걸 훔쳐가거나 은근히 할머니를 홀대하거나 가족에게 선 넘는 발언을 해도 뭐라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보호사도 구하기 어려우니까. 보호사가 퇴근하는 주말이면 가족이 돌봐야 해서 국내라도 마음 놓고 놀러 간 적이 없다. 보호사는 센터보다 훨씬 비싸다. 큰돈을 굴리는 회사에서는 월급 300만 원이 큰 게 아니겠지만, 평범한 가정에서는 아무리 지원금이 나와도 달마다 한 사람의 월급을 감당하기 벅차다. 월급에 그가 할머니집에서 쓰고 먹는 등의 추가비용은 별개다. 돈은 끝도 없이 나가고 엄마의 일상은 8년째 온통 할머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할머니는 응급실을 거진 열 번은 가고서도 번번이 살아났다. 백신을 맞고 심근경색이 왔을 때도 스탠트 시술을 받고 구사일생했고, 그 보람도 없이 코로나에 걸렸을 때에도 며칠을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슬그머니 회복했고,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한 겨울에도 시꺼먼 얼굴로 다시 살아났다. 할머니가 끈질기다는 생각을 한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면서... 본인도 가족도 괴로우니 이제 좀 놓아주면 좋을 텐데. 한 번이라도 응급실에 조금만 늦게 갔더라면 결과가 달랐을까 하고 누군가 들으면 악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상상을 은밀히 하기도 한다. 엄마는 이런 나를 책망한다. 할머니가 널 얼마나 예뻐했는지 아냐면서. 나도 당연히 안다. 모를 수가 없다.
엄마는 평생 워킹맘으로 살아왔다. 서울과 인천 외곽이라는 먼 통근거리 때문에 새벽같이 나가 밤에 돌아와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그 사이를 채워주던 건 미취학 시절에는 이름 모를 많은 중년 여성들이었고 초등학교 이후에는 할머니였다. 여러 손을 타면서 자란 나와 동생을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싶었던 엄마가 할머니 집 근처에 이사 온 이후부터 할머니는 엄마를 대신해 주었다.
외벌이가 대부분이었고 마땅한 돌봄 교실도 없던 2000년대에는 집에 가면 엄마가 있는 풍경이 흔했다. 그때의 나는 하교 후 집에 가면 밝게 불이 켜져 있고 엄마가 맞아주고 간식도 만들어주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그래도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 할머니 집이 있어 아주 쓸쓸하지는 않았다. 너무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흐릿해졌지만 할머니와 함께 걸어 다니고 할머니를 보러 걸어가던 조용한 오후의 아파트는 생생하다. 할머니는 참 엄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할머니'의 이미지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부모님도 강요한 적 없는 공부를 시켰고 밥을 조금이라도 많이 먹으면 살찐다고 불호령을 했고 억지로 운동을 가게 했다. 유독 수영 수업에 가기 싫어하자 나를 달래러 떡볶이를 한 컵만 사주곤 했다. 떡볶이를 다 먹으면 좋든 싫든 체육센터를 가야 했다. 어릴 적 유행하던 인라인 스케이트를 가르쳐준 사람도 할머니였다. 네발 자전거에서 보조바퀴를 떼고 두 발 자전거로 처음 균형을 잡은 순간에도 내 옆에는 할머니가 있었다. 어느 날 오후는 손잡고 지하철로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보기도 했다. 쪼글쪼글해서 신기한 질감이던 할머니의 마른 손과 번쩍거리는 빛과 생생하고도 시끄러운 소음과 비린내...
어른에게 입바른 말을 따박따박하기를 좋아하던 초등학생이던 나를 할머니는 혼내지 않고 말을 잘하니 아나운서가 되라고 했다. 더 나이가 들어서는 공부를 잘하니 장관이 될 것이라 했다. 늘 직설적인 할머니의 흔치 않은 칭찬은 사람을 으쓱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치매에 걸린 후에도 없는 말은 절대 못 하는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는 예쁘다는 말을 아끼다 나에게 종종 해주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웃었다.
할머니 안의 할머니는 어느샌가 죽은 지 오래일 것이다. 가끔씩 번쩍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는 정신은 몸이 기억하고 있는 전생의 습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할머니가 죽어도 살아도 슬플 것이다. 이래서 치매가 악마의 병이라고 불리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