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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십칠도씨 Jun 10. 2023

2022 취준일기(5): 여초직장 vs. 남초직장

남초회사의 여직원이 된다는 것

남초 회사를 다니기 전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취준을 계속하면서 느낀 건, 여성들이 물론 차별도 받지만 종사하는 산업 자체도 별로 고부가가치 산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표적인 여초 집단이 간호사, 교육, (유아) 보육, 사회복지, 문화예술 등인데 이런 업계는 인당 만들어내는 돈의 단위가 적거나, 그 가치가 산술적으로 계산되기 어렵거나, 너무 불안정하다. 대조적으로 정유사, 제조업, 운송업, 금융업 등의 남초 업계는 한국 산업구조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창출 가치 또한 산술가능하게 크다. 커리어 면에 있어 성차별이 여전히 존재하고 해결되어야 하지만 이런 불편한 진실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임금격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업계의 선택도 중요할 것이라고 느껴졌다."


공교롭게도 남초기업에 최종합격을 했다. 회사를 다니며 내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여초와 남초의 차이는 단순히 선택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일을 하자고 내 재능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기분이 들었던 저연봉의 여초 직장, 즉 교육업계에 들어가기 싫었던 마음도 분명 있었다. 차라리 무료로 재능기부하는 것은 상관없다. 그건 나의 선택이니까. 하지만 열정을 쏟은 일에 터무니없이 적은 월급을 받는 건 참을 수 없다. 특히 글쓰기 같은 경우는 내 자존심과도 같은 영역이라서 잘 팔리기 위해 세태에 영합하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는 고집일지 몰라도 내 최후의 보루였다. (브런치에서 잘 팔릴만한 글이 뭔지 뻔히 알면서도 내가 쓰고 싶은 글만 쓰는 것도 이런 이유다. 돈을 받지 않고 쓰는 글은 나에게 무한의 자유를 준다.)

하지만 내가 못하는 분야라면 월급이 얼마든 별 상관이 없었다. 회사의 본질은 거칠게 말하자면 이윤 창출을 위해 구성원들을 최대한 착취시키는 것이기에, 그런 집단 안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된다면 점점 쳐다보기도 싫어질 것 같았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들이 나의 일부로 느껴졌기 때문에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더 전공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직업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소원(?)대로 난 그동안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낯선 일을 하게 되었다.


해운업. 직원들의 머릿수에 비해 왔다 갔다 하는 돈의 크기는 매우 큰 산업이었다. 논문 몇 자 읽고 유튜브로 찾아본 지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실무는 내 생각과 달랐다. 배 회사인데도 배를 직접 볼 기회는 없었고, 아주 비싼 가상의 배를 가지고 플레이하는 살 떨리는 돈놀이에 가까웠다.(이 비유가 기분 나쁘게 들리는 업계 종사자들이 있다면 미리 사과를 드린다.) 해운업이란 많은 면에서 금융업과 닮아 있었다. 돈이 많이 굴러다니는 곳에는 왜 여자들이 적을까 하는 아쉬움과 의문을 가지고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유를 아주 잘 깨달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버티려면 남자가 되어야 했다. 여자가 끼어들게 놔두지를 않았다. 여자들이 여초 직장에 많은 것은 괜히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회식 때는 당연히 참석해 밤늦게까지 폭음을 즐겨야 하고, 술을 조금이라도 빼면 한소리 듣고, 담타(담배 타임)에 나가서 아부 떠는 직원은 일 안 하고도 예쁨 받고, 아버지뻘의 남자 상사들이 예쁘다고 성희롱을 해도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겨야 하고, 점심때 상사의 강요로 만취해 토하고 돌아오는 동기의 넋두리를 전해 듣는 곳이 남초 회사였다. 아니다, 모든 남초 회사들이 이렇지 않겠지. 해운업이 유독 남초식 문화가 강하고 회사도 HMM이나 팬오션이 아닌 구식 중견기업이라 더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남초집단이라는 것의 특징을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여자가 버티기 힘들고 아마 살아남으려면 '사회적 남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 유일한 여성 고위직이었던 내 상사를 보면 그 사회적 남성이라는 게 뭔지 아주 잘 느껴졌다. 난 그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비교적 돈 많이 주는 남초기업도 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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