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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십칠도씨 May 27. 2023

도시적 이미지로 직조된 두려움과 유년의 우물

기형도 시인의 시 세계 분석

    유년의 불행은 그에게 영원한 트라우마이자 뮤즈였다. 이성복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성복, 「극지의 시」. “어떻게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말함으로써,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 말의 일차적인 희생자가 되고, 그가 자초한 희생을 어떻게든 피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말은 일종의 상징이 되는 것”(10-11) 무언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발화대상을 해체하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하여 말하는 행위 자체가 상처를 주기 때문에 그의 시는 어둡고 불안하다. 아파도 말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독한 자해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해체가 있어야 불완전하게나마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가능하다.

    시 속에 풀어놓는 이야기는 생생하고도 진솔한 고백으로서 독자에게 전달된다. 어두운 내면의 그림자를 풀어낸 시는 많은 평론가들이 말했듯 퇴폐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기형도 시가 퇴폐에서 멈추지 않았다고 증명할 수 있는 지점은 그가 우울 속에 침잠된 그 상태로 멈추지 않고 미약한 희망을 기어이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절망에 놓였을 때 작은 희망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시라는 장르는 불가능한 기호이고, 희망을 노래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한 시도일 수 있다. 불가능을 시도하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문학이 시라고 한다면 기형도가 보여주는 시 세계는 그러한 시적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의 이미지

    기형도의 도시에는 비가 내리며 안개가 낀다. 안개와 비, 겨울과 새벽을 배경으로 하는 시가 많다. 그에게 도시는 차가우며 스산하고 축축한, 그러면서 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경직된 공간이다. 날씨를 통해 도시의 다면적 모습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도시의 안개는 식물과 공장, 사람까지 집어삼킨다. 안갯속에 섞인 인간은 도시와 닮아간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12). “우리는 새벽 안개 속에 뜬 철교 위에 서 있다. 눈발은 수천 장 흰 손수건을 흔들며 하구로 뛰어가고”(117) “우리”는 축축한 “물빛이 되어” 안갯속으로 녹아들고, 그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대처를 할 수가 없다. “안개 속으로 물빛이 되어 새떼가 녹아드는 게 보여? 우리가.”(117) ‘나(혹은 우리)’는 이미 도시와 한 몸이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31)는 시구에서도 기형도는 자아 없는 기계적 습관 속에서 평화를 얻는 도시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안개가 주는 흐릿하고도 찬 분위기는 시의 전체적 정서를 구성하면서 시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상관이 없다는 면죄부를 준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 ...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13) 그의 시에서 안개는 도시의 정체성 중 하나이다. 도시에서 일어난 일은 그러므로 도시 자체의 문제가 아닌 “개인적인 불행”으로 남는다. 안갯속 도시의 이미지에는 도시와 도시인의 비정함과 무관심이 담긴다. 이것을 관찰하는 ‘나’는 아직 도시의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채로 관찰한다. 그의 눈에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20). 도시의 친구들은 말한다. 오히려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미덕일 지도 모른다고.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50) 그도 곧 친구들처럼 도시인이 되어 갈 것이다. "설령 사내를 며칠 후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어떠랴. 누구에게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20) 불은 땅속에 묻혀있고 지상에 남은 건 무력한 “우리”와 “축축한 톱밥”뿐이다. “땅속 깊이 불을 저장하고 우리는 일어섰다. 날음식처럼 축축한 톱밥이 우리를 쳐다보았다.”(109) 분명 바라보는 주체는 인간이지만 톱밥이 인간을 쳐다본다는 표현은 기계 같은 인간의 삶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돌처럼 확고한 일정에 맞춰 노동을 하는 도시인의 모습은 쓸쓸하다. “화강암 같은 시간의 호각 소리가 우리를 재촉하고 새벽은 화차 속의 쓸쓸한 파도를 한 삽씩 퍼올렸다”(109) 도시에는 안개처럼 의뭉스럽고, 살얼음처럼 날카로우며 약하고, 톱밥처럼 서걱거리며 소통하지 못하는 개개인이 살고 있다. 그들도 한때는 “아름다운 불씨”였다는 기억만 간직한 채.     


두려움과 허무, 존재의 공포

    기형도의 시에서는 유독 두려움이 자주 등장한다. “이 밤,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 꽝꽝 빛나는, 이 무서운 백야”(17),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31),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43),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134) 등 두려움을 언급한 상황과 소재는 특정하게 고정돼있지 않고 다양하다. 많은 것을 두려워하는 그가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25)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가 두려워하는 어둠, 침묵, 미래, 고독 등이 개인적 차원에 불과한 것일까? 이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맞닥뜨리는 보편적 삶의 두려움에 가깝다.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 기형도의 시가 대응하는 일차적인 방법은 허무감과 우울, 인생을 다 산 듯한 권태이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80) 젊음이라면 느껴서는 안 될 (혹은 허락되지 않은) 허무감은 ‘나’를 괴롭힌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에서는 자신이 마치 노인이 된 것처럼 인생을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로 표현하기도 하지만“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45), 오히려 이런 진술이 그의 젊음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이 노인처럼 느껴진다고 인정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젊음의 특권이다. <질투는 나의 힘> 또한 불안과 자아의 흔들림을 보여준다.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 뿐"이었다거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는 진술을 통해 그가 사고의 준거를 외부에 두고 자신은 그곳에 가닿지 못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고 스스로가 충분치 못하다고 느끼며 방황하는 모습은 젊음의 불안함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시의 시점이 "책갈피"가 떨어질 때라는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53) 그런 시절을 견뎌내고 오랜 시간이 흘러서 결국 그 페이지를 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미약하지만 분명한 희망을 설정하고 있다.      


유년을 거슬러 오르기

    두려움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 보면 유년의 경험에 맞닥뜨리게 된다. 눈에 띄는 것은 아버지에 관한 진술이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46) “아버지, 불쌍한 내 장난감 내가 그린, 물그림 아버지”(99) 등으로 보아, 화자의 아버지는 “빨랫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러닝 셔츠”만큼이나 약한 존재이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가족의 해체는 성인기까지 이어지는 불안과 두려움의 근원이다. 이는 마지막 시인 <엄마 걱정>에서 쓰인 “지금도”라는 시어로 증명된다.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134)이라는 표현에서, 유년의 기억이 그 시절에 봉인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그에게 어떤 정동을 일으킴을 알 수 있다. 성인 화자는 유년의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역설적이게도(혹은 당연하게도) 그것이 시의 원동력이 된다.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은 여러 시에서 되살아난다. <위험한 가계 1969>, <바람의 집>, <너무 큰 등받이의자>, <폭풍의 언덕>, <엄마 걱정> 등은 불행한 유년의 기억이 가장 잘 반영된 시들이다. 아버지는 현재 “어떤 약도 듣지 않”은 상태로 중풍에 걸려 누워계시고, 그전에도 “(실패하시고 나서)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신 무능력한 가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엄마는 혼자 삶을 헤쳐나가려 고군분투하고, 누나는 공장에 나가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어머니는 “너는 아버지가 끊어뜨린 한 가닥 실정맥”(115)으로 화자를 바라본다. 동맥이 아닌 정맥, 그중에서도 대정맥이 아닌 실정맥이라는 비유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화자가 굉장히 작고 약한 존재라는 자의식을 느낀다는 것과, 죽은 피를 운반하는 (혹은 죽은 피가 고여있을) 혈관이라는 점에서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95) 그의 내면에는 어릴 적부터 죽음의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된다. 그가 인식하는 젊음도 유년과 크게 다르지 않아,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고“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53), 사랑에 실패하며“나 그 술집 잊으려네 ...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난 내 사랑 잃었네”(78-79), 결국 자신과 사랑을 빈집에 가둔다"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81). 그가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낸 이유도 있겠지만, 이는 젊음 그 자체의 속성일 수도 있다. 유년과 젊음은 그 어느 때보다 죽음에서 먼 생동하는 삶의 시기처럼 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시기에 죽음의 그림자는 더욱 어둡게 드리운다.      


깊은 절망의 우물에서 건져 올린 역설적 희망

    기형도의 시 세계는 그가 바라본 도시처럼 축축하고 깊고 어둡다. 그의 시가 그러나 끊임없이 재생되고 사랑받는 것은 그 우물에서 건져낸 희망이 그의 시가 노래한 어두움으로 인해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절망과 희망은 다른 형상을 하고 찾아오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줄기”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이 화자가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76-77)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48). 이 문장은 시집을 가득 채운 불안함, 두려움, 쓸쓸함, 유년의 불행을 제치고 그가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는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는 대책 없는 낙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절망이 인간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자신도 두려워하던 절망을 용기 있게 마주한다."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49) 삶이란 절망과 희망, 생과 죽음이 모순적으로 교차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113). 그의 시를 퇴폐에 머물지 않게 하는 힘은 깊은 유년의 우물을 관통하는 강한 빛이다.                                                                                                                                                                                


주텍스트

   기형도, 「잎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참고문헌

   이성복, 「극지의 시」. 문학과지성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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