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과 애랑은 신분적으로는 기생으로서, 판소리계 소설인 「춘향전」과 「배비장전」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춘향과 애랑은 당시 여성의 관습적 삶에 얽매이지 않는 주체적인 모습으로 보이면서도, 동시에 남성 등장인물이나 남성적 시선 속에서 성적 대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중성은 모순적이기에 더욱 특징적이다. 춘향과 애랑이라는 캐릭터에 투영된 ‘기생’이라는 존재가 당시 독자와 청중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두 작품 사이의 공통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춘향전」의 이본들 중 남원고사를, 「배비장전」은 신구서림본을 기준으로 한다.)
이몽룡과 배비장이 여성 인물들을 처음으로 조우하고 반하게 되는 계기는 육체성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춘향이 그네를 타는 모습은 적당한 거리감과 역동성을 지니며 움직임으로 인해 몸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된다. 이몽룡은 멀리서 춘향의 외모를 감상하며 황홀해하고, 이 때 남성에서 여성으로 흐르는 시선의 이동은 「배비장전」에서도 반복된다.
“섬섬옥수를 들어다가 그넷줄을 갈라 쥐고 솟구쳐서 뛰어올라, ... 나는 듯이 나갔다가 나는 듯이 오는 거동은 진나라의 왕녀 농옥이 난새를 타고 옥경으로 향하는 듯, 무산의 신녀가 구름을 타고 양대 위에 내리는 듯 하구나. 한창 이리 노닐 적에 이 도령이 바라보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마음이 취해 정신이 사난 눈동자가 몽롱 의사가 호탕 심신이 황홀하다.”
배비장이 애랑을 처음 만나는 장면 또한 이러한 춘향전의 서사를 의식한 것으로 보이는데, 애랑이 목욕하는 장면에서 첫 만남을 이뤄지게 만들어 육체성을 더욱 노골적으로 부각한다.
“이 때 배비장이 글을 읊고 무료히 앉았다가 우연히 수포동 녹림간을 바라보니, 양안도화 어린 곳에 옥녀 일색 일미인이 어릴락 비칠락 백만 교태를 다 부리며 춘광을 희롱할 제 ... 연적 같은 젖통이도 씻어 보고, ... 배비장이 그 거동 보고 어깨가 실룩 정신을 잃어 구대정남 간데없고 도리어 음남이 되어 눈을 모로 뜨고 숨을 두둑나무하다 쫓긴 듯이 어깨춤에 호흡을 통치 못하며 혼자 이른 말이, ‘뉘 여인인지 모르거니와 사람 여럿 굳히었겠다.’”
배비장이 애랑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것은 공통적이지만, 춘향의 경우와는 달리 애랑이 서술되는 방식은 관음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성적이며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이러한 첫 만남의 차이는 이후에 두 이야기가 전개되는 양상에도 영향을 준다.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은 고난을 거쳐 서로의 믿음을 확인하여 정신적 사랑으로 발전하지만, 애랑은 배비장을 의도적으로 유혹하여 (첫 만남에서 서로의 상황을 반전시키듯) 알몸으로 만들고 망신주는 것으로 끝난다. 같은 기생임에도 각자의 행실이나 가치관에 따라 이야기가 상이하게 전개된 것이다. 이 차이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열녀와 성적 대상
두 주인공의 설정은 당대 창작자와 수용자의 이중적인 여성상을 드러낸다. 춘향 캐릭터에서 독특한 점은, 남성을 유혹하거나 수청을 드는 일이 자연스러운 기생이라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도덕적 의무인 열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가해진다는 것이다. 춘향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이몽룡에 대한 절개를 지키려는 이유가 단순히 남녀간의 사랑인지, 사회적으로 학습된 ‘열’에의 의무감인지는 텍스트에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춘향이 지배 문법을 철저히 내면화하여 기생보다는 열녀로 자신을 규정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춘향의 굳은 의지는 십장가 대목을 통해 드러난다.
“일광로 신선 같은 우리 도련님을 하루아침에 이별하고/ 일신에 맺힌 슬픈 한이 날이 갈수록 사라지니/ 일 척 단검에 목숨을 바쳐 일백 번 죽사와도/ 일심에 정한 마음은 일정 변하지 아니리다. ... 십팔 관문에 목을 베어 걸어 놓는다 해도/ 십칠 년을 기른 뜻은 죽어서 간다는/ 시방세계로 돌아간다 한들 변할 길이 전혀 없네.”
사또의 수청을 들기를 거절하고 절개를 지킨 그의 행동은 정렬부인이 되는 것으로 보상을 받는다. 반면, 애랑은 유혹이 성공한 것에 대해 칭찬받고 금전적 이득을 얻지만 춘향의 경우와는 달리 그의 행동이 귀천(貴賤)을 결정하는 것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즉 ‘열녀-귀함’, ‘기생-천함’으로 정리할 수 있다. 열녀와는 거리가 먼 애랑은 여성에게 부여되던 의무에서 비교적 자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애랑의 유혹 또한 주체적인 것에서 멀었으며, 자신들의 성적 욕망의 책임을 기생의 유혹으로 넘기고 싶던 당시 청중의 욕망을 반영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또 분부하시되, ‘너희 중에 배비장을 흠하게 하여 웃게 하는 자 있으면 중상을 줄 것이니 그리할 기생이 있느냐?’ 그중에 애랑이 여쭈오되, ‘소녀가 불민하오나 사또 분부대로 거행할까 하나이다.’”
애랑은 배비장을 골탕먹이고 싶던 사또에게 훼절을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된다. 애랑이 결과적으로는 배비장을 망신주는 데에 성공한다 해도, 그는 그 과정에서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그친다. 유혹을 ‘하는’ 애랑의 존재는 지워지며 시선을 ‘주는’ 배비장이 존재할 뿐이다. 또한 제주목사는 배비장이 망신을 당한 뒤에 선심을 쓰듯 애랑을 선물로 준다. 남성 캐릭터를 유혹하고 놀린다고 해서 애랑에게 주체적 삶을 획득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춘향의 경우는 어떠한가. 춘향은 결과적으로 사랑을 이루고 신분이 상승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몽룡에게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해진다.
“(이몽룡은) 즉시 내려가 붙들고 싶으나 한번 속여 보려고 음성을 바꿔 분부한다. ... ‘너를 이제 풀어 주어 수청으로 정할 테니, 바삐 나가 세수하고 머리 빗고 빨리 올라와서 수청 들라.’ 춘향이 이 말을 듣고 움쭉 소스라쳐 말한다. ... ‘얼음 같은 내 마음이 이제 와서 변할쏜가? 어서 바삐 죽여 주오.’ 눈을 감고 이렇듯이 악을 쓰니, 어사가 이 말을 듣고 박장대소하며 칭찬한다. ‘열녀로다, 열녀로다. 춘향의 굳은 절개는 천고에 무쌍이요, 아름다운 의기는 고금에 일인이라.’”
이몽룡도 자신에 대한 절개를 지키려고 모진 고난을 겪어온 춘향을 마주한 순간까지도 그를 시험하려 하며 그 모습에 “박장대소”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다. 춘향은 마지막까지도 양반인 이몽룡에게 진정한 사랑의 상대라기보다는 신분적 관계에서 있어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용도로 쓰이는 대상에 가깝다. 기생의 신분으로 힘들게 절개를 지킨 열녀라 하더라도 동등한 인격체가 되지 못한 것이다.
이중적으로 대상화된 기생의 정체성
춘향과 애랑은 공통적으로 남성이 한눈에 반할 정도로 매력적인 용모를 가진 기생이지만,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전혀 반대되는 목적으로 사용한다. 춘향은 신분상승의 발판으로, 애랑은 배비장의 가식을 폭로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춘향은 기생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한껏 부정하지만 애랑은 오히려 기생으로서의 자신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표면에 드러난 목적 외에 그들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텍스트 속에서 춘향의 목적이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이었는지 진정한 사랑의 성취였는지 드러나지 않고, 애랑의 경우 또한 표면적으로 드러난 ‘배비장을 유혹한다’는 목표 외에 애랑의 내면에 있는 진정한 목표를 읽어내기 어렵다. 여성이 주인공이라고 해도 남성의 시선 속에 대상화된 기생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내면과 동기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점잖은 사대부 양반이 정신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인 열녀, 그리고 육체적이며 욕망을 자극하는 대상으로 존재하는 여성이라는 이분법은 전혀 다른 시선이면서도 공통적 분모가 있다. 춘향은 자신의 정절을 통해 고난을 이겨내고, 애랑 또한 자신의 매력을 이용하여 목표를 달성하는 주체적인 모습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지만, 동시에 남성의 시선 속에서 성적 대상으로 치환된다. 이 두 여성 주인공들은 대조적인 정체성 규정을 통해 주체적으로 목표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정체성은 그들 자신이 아닌 남성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기생 서사에서 “‘나쁜 기생’은 남성의 쾌락을 확장하기 위해, ‘열녀 기생’은 남성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 존재”하며, 이때 인간 주체로서 기생의 자유와 섹슈얼리티는 소외당하고 만다. 두 이야기는 당대의 이야기 수용자들, 즉 독자와 청중의 시선을 반영하며 기생을 바라보던 시각에 대해 단초를 제공한다.
주텍스트
남원고사: 19세기 베스트셀러, 서울의 춘향전. (2008). 이윤석, 최기숙. 서해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