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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리카 Nov 08. 2023

다른 길, 같은 지점

수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조금은 흥분한 듯한 목소리가 나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투자, 사업, 이민'

그가 떠드는 이야기 대부분은 내 귀를 그저 스쳐지갔다. 그러나 저 세 가지 단어에서 다시금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또 무슨 허황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가. 또 무슨 헛된 희망을 갖자는 것인가. 대뜸 화를 내며 소리치고 싶지만, 그럴 기력마저 남지를 않았다.

한참을 흥분하며 떠들던 그가 잠시 잠잠해진다.

"현주야,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

무언가 대답을 하면 울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우리 여기서 새 삶을 살자. 하준이랑 같이 셋이서."

"......"


새 삶? 새 삶이라고? 현실을 버리고 가서 다시 맞닥뜨릴 새로운 현실이 고작 새 삶이라고? 그마저도 대안이라는 게 겨우 위장이혼으로 내 명의로 하나 건진 아파트를 처분하고?

 새 삶을 찾으려고 했다면 끝까지 여기에 남아 있었어야 했다. 가족 곁에서 무엇이든 바닥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홀연히 사라져 놓고 이제 와서 베트남 투자니, 이민이니 하는 말을 하다니......

"현주야...... 알아... 나에게 실망 많이 했다는 거. 하지만......"

"나한테... 왜 그래?"

실망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 그런 거였나? 내가 기대를 했었던 건가? 그래서 실망한 건가? 그래도, 나는 끝까지 그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너 진짜 너무해. 너 진짜 너무하다고."

언제나처럼 눈물이 흐를 것 같으면 입술을 꽉 깨문다. 그러면 여지없이 눈물은 더 큰 압력으로 삐져나온다. 삐져나오는 눈물을 애써 멈추려고 더 세게 입술을 깨물다 보면 심장 안에 눈물이 고여 요동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한테 한번 더 기회를 줘."

"… 다시는... 나한테 전화하지 마!"

"현주야......"

"전화하지 말라고!"

“내가 미안해. 그런데 지금은 진짜 나 한번만 믿어보면 안 될까?”

”다시는 나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

더 이상은 눈물도 화도 참아낼 수가 없다.

“다시는!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전화하지 말라니까! 전화하지 마!!!”

결국 내 심장이 터져버린 것 같다.

지금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악이다. 그냥 내 심장 속에 꽁꽁 묶어두었던 악이 터져 나왔다. 방 안에서 울고 있는 하준이의 파장이 내 악다구니 속에 삼켜져 버렸다.




엄마는 오늘도 하루종일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벌써 6개월째이다. 우편함에 가스와 전기 체납 고지서가 쌓여있다.

평생 아빠만 바라봤던 엄마, 존경받는 의사의 아내, 나이에 비해 젊고 아름다운 모습, 친구들 사이에서 엄마는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엄마는 아빠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 무너져 내렸다. 의사의 아내였던 자신의 신분이 무너져 내렸고, 아버지를 통한 넉넉한 재정이 무너져 내렸다. 엄마를 이해하려고 했다. 나와 은주 때문에라도 엄마가 일어설 줄 알았다. 모성애에는 평생 아빠의 그늘에서 안주하던 엄마를 사회로 이끌어낼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을 이끌어내지는 않는가 보다. 아니면 우리 엄마가 그렇게 모성애가 없는 사람이던가. 엄마가 힘을 내주기를 바랐다. 엄마가 저녁을 차려주지 않는 횟수가 늘어나자 내가 대신 은주와 엄마의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힘을 낼 수 있도록. 수능이야, 한 해 놓쳐도 엄마가 힘을 내준다면 다시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엄마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의 무기력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이렇게까지 엄마를 위해 노력했는데, 어떻게 엄마라는 사람이 이럴 수 있지? 나는 절대로 엄마같이 살지 않겠다. 나 스스로 지켜내는 사람이 되겠다. 남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바보 같은 삶은 살지 않겠다.

난 내 아이에게 절대로 저렇게 무책임한 엄마는 되지 않겠다. 누워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고 또 깨물었다. 새어 나오는 울음을 꾹 삼키며 그렇게 다짐했다.



‘아… 꿈이었네……’

방 안으로 햇살이 세어 들어온다.

“엄마……”

어제 그렇게 남편에게 악다구니를 쓴 나는 그대로 울다가 잠든 것 같다. 소파 위에 엎드린 채로 아침이 밝았다. 꿈이지만, 엄마를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엄마같이 살지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 그렇게 열심히 육아휴직도 안 하고 버티고 버텼었는데, 가장의 역할까지 올바르게 해내는 엄마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왜, 나는 지금 엄마와 똑같이 아이를 방치하게 된 것이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같은 지점에 도달하게 된 이 상황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남편을 잘못선택해서? 남편의 그늘에 살지 않기로 작정하고 그의 배경이나, 경제력, 능력을 애초에 따지지 않았다. 그것이 잘못인 건가? 그럼 나는 엄마랑 무엇이 다른 거지?


하준이 역시 방에서 울다 지쳐 잠든 것 같다. 학교에서 돌아와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새우잠을 자고 있다. 아이의 잠든 모습에 머리를 쓰다듬는다.

‘강해지자. 더 강해지자. 지금까지 잘해 왔잖아! 엄마랑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어. 하준이는 나와 달라야 해.’

“엄마……”

“응, 일어났어? 이제 씻고 학교 가야지.”

눈을 비비고 몸을 일으킨다.

“어서 씻고 옷 갈아입고 나와, 엄마가 오랜만에 계란 토스트 해줄게.”

잠이 덜 깬 하준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화장실에 세수를 하러 들어간다.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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