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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리카 Nov 22. 2023

코모레비(木漏れ日)


“엄마! 엄마랑 학교 가니까 너무너무 좋아!”

“응?”

“너무너무너무 좋아!”

오랜만에 강아지같이 뛰어다니는 하준이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맞아. 그랬지. 하준이만 바라보고 버텨냈는데. 이제 더 버텨내야 해.

“하준아, 이제 엄마 다음 달부터 복직할 거야.”

“……“

하준이는  엄마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기쁘기도 하면서, 회사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서운함도 섞여, 스스로도 어떤 마음인지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입은 웃다가도, 눈썹은 내려앉은 묘한 표정이다.

“엄마가 열심히 일해서 돈도 벌어야지.”

“……그럼….. 아빠는?”

하준이의 입 안에만 맴도는 단어, 안 들릴 것 같지만 보인다.

“아빠는 하준이를 사랑하고, 하준이랑 엄마랑 함께 살고 싶어 해,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그럴 수 없어.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일단은 조금 더 기다려보자.”

“……”

하준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실 나 조차도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어떡해 헤쳐나가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해답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한 달을 지냈지만, 결론은 하나뿐이다. 삶을 살아내는 것, 아이와 나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 집을 지키는 것, 아이의 생활을 지키는 것, 그것이 나를 지키는 것이고, 나와 내 동생을 지키지 못한 엄마의 인생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하준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아파트 산책로를 들어갔다. 서울이라고 하지만, 경기도의 어떤 지역보다 도심에서 더 멀다고 할 수 있는 이곳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나는 우리 아파트의 산책로를 참 좋아한다. 그 이유는 내가 가장 위로를 받았던 그 길과 너무 닮아있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와 학업으로 지치고 지쳤던 나를 위로해 주었던 동경 외곽의 그 길과, 육아와 직장으로 몸이 천 갈래 만 갈래 부서졌던 내 몸과 마음을 치료해 주었던 이 길. 두 길의 공통점은 눈부신 코모레비 때문이다. 코모레비’木漏れ日’, 우리말로 직역하면 나무 사이로 흐르는 햇빛이다. 나무 그늘 사이로 흘러내리는 햇빛, 땅에 비쳐 흔들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20년 전의 그 길도 그랬다. 그때 그 길 위에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 사이로 흐르던 햇빛, 그것을 ‘코모레비’라고 부른다는 것을 그가 알려줬다.






2003년 4월


학생, 학생… 뒤에 뭐가 묻었는데, 내가 닦아줄까?” (초록색 글씨는 일본어)

네? 어디요?

여기.. 여기 말이야… 잠깐만 “

무언가 나쁜 기운이 엄습한다.  50은 넘어 보이는 왜소한 몸, 어두운 피부, 그의 목소리에서도 음산한 기운이 느껴진다. 슬슬 다가오던 그는 어느덧 내 뒤에 자신의 몸을 밀착한다.

괜찮습니다. “

황급히 몸을 돌려 가던 길을 돌려 가려고 할 때, 갑자기 그놈은 더 몸을 들이밀며 내 허벅지 쪽으로 손을 댄다.

아니, 내가 닦아준다니까.

분명 지금 도망가야만 하는데, 몸도 목소리도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다. 한밤중도 아니고, 백주대낮에도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아름다운 산책길에서……

진흙을 뒤집어쓴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몰려온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학생들이 한 둘 보였지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이 그들은 자기 갈 길이 바빠 보였다. 그놈은 주변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 어~ 죄송합니다~ 비켜주세요!!”

그때, 어디선가 오래된 자전거의 삐그덕 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다급함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어어어~!!! “

자전거가 급히 다가오자 나에게 몸을 밀착시켰던 그 이상한 놈은 후다닥 자리를 달아났고, 자전거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놈의 자리를 대신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넘어지듯 멈추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있던 청년은 도망가는 그놈을 향해 더 크게 소리쳤다.

나 역시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벌어져 어떻게 무엇을 수습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약 30초간의 정적 후, 일단은, 넘어져 있는 이 청년이 무사한지를 확인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괜찮아요?”

아, 예, 괜찮습니다.

청년은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고, 자신의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일 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이렇게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일본인은 별로 못 봤던 것 같다.

“혹시, 한국사람?”

“네? 아, 네…. “

어쩐지, 이런 길에서 겁도 없이 매일 걸어서 학교를 가는 여자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사람이었네. 타마대학 학생입니까? “

일본남자 특유의 날카로운 선이 없는 것 같아, 이 남자 혹시나 한국사람인가 싶었는데, 역시나 한국인이다. 일본어 억양이 섞인 어눌한 한국어 말투이다.

“네”

“올해 신입생입니까? “

“네”

신입생이라 잘 몰랐던 건가? 허긴, 이렇게 아름다운 길에서 대낮에 이상한 사람을 마주칠 거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모습을 한참 쳐다봤다. 서툰 한국말로 존댓말을 열심히 구사하는 모습은 어르신 같이 진지한데, 일본어로 중얼거리는 모습은 장난기 어린 소년 같다. 묘하게 어우러진 그의 표정은 확실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한국사람 이세요?”

“네, 올드커머입니다. (Old commer).”

“올드커머?”

“우리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왔으니까 저는 올드커머, 당신은 뉴커머.”

“아… 올드 앤 뉴..”

자전거를 이리저리 만지던 그의 눈과 마주쳤다. 길고 선하게 웃는 눈매. 조금 넓지만 균형 잡힌 얼굴 선. 누구라도 이런 청년이 치한으로부터 구해준다면 운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속으로 피식 웃었다. 운명을 믿을 몸과 마음의 여유도 없이 일 년 동안 죽어라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다. 그리고, 지금도 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여전히 생활비며, 학비며 몸이 부서져라 벌며 학교를 졸업해야 한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쉬는 시간은 등굣길의 이 산책로였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산책로가 치한들이 활개하고 다니는 곳이라니……

“아무튼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 치한 만나기 쉬운 곳이에요. 역에서 학교까지 자전거로 다니거나, 대로로 다니던지 해야 합니다.”

“네……”

아쉽게 숲길을 바라보는 나의 표정을 그가 읽은 걸까? 아니면 그 역시 이 길의 아름다움을 공감하는 것일까?

“이길…… 참 예쁘죠? 저도 가끔은 자전거에서 내려서 코모레비를 한참 즐기기는 합니다. “

“코모… 레비?”

“네, 코모레비, 여기 이 숲의 나무들. 나무랑 나무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햇빛이라고 설명하면 될까요?”

“코모레비… 코모레비…“

참 어울리는 단어다. 따뜻하고 밝은 빛이면서도 나뭇잎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흔들리는 그 모습이 그림자 같기도 한 묘한 빛의 파장이다.

“혹시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등교하실래요? 이 동네 치한은 그렇게 세지는 않아요. 옆에 남자친구같이 누가 있는 것 같으면 못 건드려요. “

‘나… 남자친구?’

혼자 남자친구라는 단어에 들뜨다니, 내가 지금 그럴 정신인가? 정신 차리자. 이 사람이 말한 건 비유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연애 따위에 관심을 쏟을 때가 아니다.

“죄송합니다. 생각해 보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오해 생길 수 있겠네요. 저,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불편하시면 거절해도 괜찮습니다. “

“아니, 아니에요, 정말로 감사해요. 같이 가주신다면 너무 좋아요!”

‘미쳤나 봐! 이렇게 덥석 물어버리면 어떡해!’

“아… 아니 그러니까요,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하는 것도 아니고요, 제가 사실 이 길을 너무너무 좋아했거든요. 그 말씀하신 코모리비? 코모레비? 그거… 그거 보면 진짜 너무 힐링되고…그러니까… 같이 가주신다면……“

횡설수설하는 내 모습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럼 오늘 수업 끝나고 만나서 수업 시간표 한번 보고 몇 시에 역에서 만날지 정합시다. 그러니까… 음, 지금은 우리 둘 다 지각인 것 같으니 빨리 학교에 가야겠습니다. 일단 제 뒤에 타세요.”

그는 자전거 뒷 짐칸을 가리켰다. 만약 오늘 저기에 타고 가도, 저 사람을 그저 도움을 주는 착한 청년으로 아무것도 아닌 듯 대할 수 있을까?

“어우, 아니에요! 저 빨리 뛸 수 있어요. 이미 늦은 거 괜찮아요!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가 나의 오른팔을 붙잡는다. 그의 미소에 햇빛이 묻어있었다. 아름다웠다.

“또 치한 만날 수 있어요. 얼른 타세요! 다음에는 조금 더 일찍 역에서 만나서 같이 걸어가요. 지금은 빨리 타세요.”

틀렸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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