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얀패모 Apr 11. 2023

하얀패모 이야기-37 아랍 안가!

아랍 안가!

그러던 하루는 또 그 논쟁이 나서 내가 아프리카 간다고 다른 곳은 생각할 수 없다고 우겼더니 사태가 다른 날 보다 심각해졌다. 늘 여유 있게 날 구슬리던 녀석은 별안간 그날 정색을 하며 심각해했다. 그러더니 그다음 날인가 긴장된 얼굴로 와서는 할 말이 있다며 날 불러내더니 차분히 말했다. 

“많이 생각했는데……나도 너랑 아프리카 갈래. 이젠 아프리카에 대해 같이 공부하자. 내가 그쪽은 잘 모르는데……먼저………”

성질 급한 내가 녀석의 말을 끊었다.

“잠깐,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랍은 어쩌고 아프리카야? 어떻게 사역지를 네 맘대로 바꿔?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거 같아?”

녀석이 아랍을 위해 정말 예비된 사람이라고 믿었기에 녀석의 말에 나는 충격과 죄책감까지 복합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녀석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지 마, 쉽게 결정한 거 아니니까. 그래, 하나님을 생각했어. 그분이 과연 무엇을 원하실까 하고……그런데 그분이 내가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는 거 안 좋아하실 거란 생각이 들었어.”

“뭐가 억지야? 너도 아랍 좋아했잖아! 너만큼 아랍을 좋아하고 또 준비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아랍도 좋지만 너 만큼은 아니야. 내가 너 없이 아랍에 가서 선교한들 무슨 기쁨이 있겠냐. 차라리 너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는 것 즐겁게 도울게. 아랍은 가끔 가보지 뭐. 아-. 이젠 홀가분하다. 이러면 될 걸 괜히 너더러 바꾸라고 했지. 됐다 이제 그치?”

“되긴 뭐가 돼? 너만큼 아랍을 위해 준비된 사람 나 못 봤어. 넌 아랍에 가야 된다고!”

“아니, 안가. 준비는 다시 하면 돼. 혼자는 절대 안 가.”

“넌 어째 인간이 그러냐? 사역지를 네 멋대로 바꾸냐? 그것도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좋아하시겠냐?”

“그래, 바로 그거야.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실까 생각해 봤어. 그러니 답이 나오더라. 하나님이 과연 내가 혼자 맨날 네 걱정이나 하며 지지하게 아랍에 있는 걸 좋아하실 것 같진 않더라고. 나 아프리카도 좋아. 너랑 있으면 재미나게 일할 수 있잖아. 더 효율적인 거지.”

“아니. 합리화일 뿐이야. 넌 지금 여자, 아니, 그러니까 친구 때문에 핑계를......”

“그래, 그냥 친구가 아니라 여자 친구라 그런다. 그래. 난 그런 놈이다. 어쩔래. 난 꼴랑 여자 때문에 사역지도 막 바꾸고 그런 놈이다. 그렇지만 난 날 속이고 살고 싶지 않고 이런 솔직한 내가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도 않은 걸 어떡하냐?”

“닥쳐, 이 멍청아. 누가 여자야? 네가 너한테 여……아니, 그런 말조차 불쾌하다. 암튼 내가 너의 선택에 걸림돌이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해.”

“그래, 난 너 때문에 아랍에 혼자 못 가겠다. 넌 단지 내 선택에 걸림돌이 된 존재가 아니라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래, 네가 중요한 존재일뿐더러 미안하지만 넌 나한테 여자다. 네가 남자면 아무리 마음이 통해도 사역지까지 바꾸지는 않아. 나도 그게 쉽게 결정할 수 없다는 것쯤 모르겠냐. 네가 그냥 친구기 때문이 아니고 네가 나의 여자 친구가 되길 바라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그걸 하나님께서 그렇게 싫어하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 분이 아니시니까!”

“부끄럽지도 않냐? 그래, 난 너에게 여자로서 친구 한 적도 없지만 네 그런 생각의 대상이 된 것만으로도, 네가 네 결정을 힘들어하는 요인이 된 것만으로도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없는데! 내가 너에게 그런 고민스러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여느 계집아이들과 다른 것이 없는 것 같아. 네가 날 그렇게 취급하는 것 같아 아주 불쾌해!” 

“넌 왜 이해를 못 해? 내가 널 여자로 좋아하는 게 왜 널 우습게 아는 거라고 생각하지?”

“그만해. 이젠 아주 대놓고 못하는 말이 없다. 좋아하다니? 너 어떻게 그렇게 말하지? 그런 관계로 만나지 않기로 했잖아!”

“그래. 미안해. 그러지 않기로 했지. 항상 느끼지만 넌 참 대단하고 난 너무 나약한 것 같다.”

“오늘은 네가 맛이 간 거 같다. 가자.”

“그래. 친구로서 마음 다시 갖는다. 노력할 거야. 그래도 아프리카로 간다. 여자 때문이 아니라 OO이라는 사람 때문에.”

“이게 끝까지!”

“이건 너에게 비난받을 수 없는 내 자유야. 내가 아프리카 가고 싶어서 가는 거고 너네 집 옆에 살고 싶어서 살 거야. 그것까지 네가 뭐라고 할 수는 없어!”

“주님의 뜻은?”

“말했잖아. 이 문제에 있어서 주님과 나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주님도 허락하시는데 너는 주님보다 높은 거 같네?”

이쯤 되면 홱 발길을 돌려 먼저 길을 잡고 쌩허니 걷는 게 상책임을 나는 알고 있다. 

“......”

‘......’

한참 후에 언제나처럼 조심스레 녀석이 먼저 입을 뗀다. 

“야”

날 선 내가 대꾸한다.

“왜!”

“너 내가 그렇게 싫으냐?”

“닥쳐라. 대꾸할 가치도 없으니.”

“내 결정이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같냐?”

“네 동기가 불순하니까.”

“정말 내가 그렇게 불순한 걸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감정인데 왜 불순하다고 하지?”

“...”

“하나님은 우리에게 노예와 같은 순종을 요구하실까? 우리는 기쁘지 않아도 그분의 일만 되면 기뻐하시는 그런 분일까?”

“아니, 하지만 네 결정은 옳지 않아.’

“왜?”

“넌 아랍을 사랑하도록 주신 그분의 마음을 네 마음대로 내동댕이 친 거니까. 너처럼 특이하게 아랍을 사랑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그 마음은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것일 것이야.”

“그럴까...... 그게 그렇게 딱 정해졌다고 믿어?”

“물론. 그러니까 다시는 함부로 그런 말 하지 마라.”

“그래. 미안하다. 내가 요즘 계속 계약 위반하지? 미안해. 공부 스트레스 때문인가? 솔직히 난 잘 모르겠어. 내가 아랍으로 부르심을 받은 건지. 그리고 그건 바꿀 수 없는 건지. 하지만 그분이 내가 행복하길 원하신다는 건 분명히 알아.”

“넌 아랍에 가야 행복해진다니까!”

“넌 아랍에 오면 불행할까?”

“물론!”

“왜?”

“첫째. 난 아랍이 그리 사랑스럽지 않아. 널 만나기 전까진 알지도 못했고.”

“하나님께서 너에게 날 보내신 것일 수도 있잖아. 지금부터 알아가도록.”

“그렇게 불공평하실 리가 없다. 넌 이미 많이 알고 있고 난 지금부터 배우면 내가 네 조수 밖에 더 하겠냐. 그건 불행이다, 내겐.”

“무슨 억지야 그게 또?”

“그러고 보니 난 아랍이 무지 싫을 거 같아. 그 시커먼 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남자들 가는 데 가지도 못하고...... 근데 걔네들 왜 그렇게 살아?”

“그건 말이야~(열심히 한참을 설명하다가).”

“다 왔어.”

“어? 벌써? 캬~너 또 샜냐? 하여튼 새는데 천재 에요.”

“네가 멍청한 거야. 하지만 그런 멍청은 앞으로 계속 유지해도 돼.”

“야, 너 암튼 아프리카 혼자 갈 생각하지 마.”

“꺼져. 가서 기도나 다시 해봐, 이 불순한 이교도야.”

“아아, 십자군 스피릿은 안 돼. 난 십자군 알레르기가 있다고.”

“잘 가. 이교도 양반. 거 봐. 네 몸엔 이미 어쩔 수 없는 아랍의 피가 흐른다고! 아프리카엔 얼씬도 마라!”

“오늘은 여기까지 하련다. 오늘도 내가 졌다.”

“잘 생각했어!”


그날 수년간의 아랍 사랑을 접은 녀석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그들을 향한 녀석의 꿈은 아름다웠다.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한 녀석은 아닌 게 아니라 점점 아랍 사람을 닮아 가고 있었다. 그날따라 그 짙은 눈썹이 더욱 아랍인 같아 보였다. 나도 녀석 말대로 무의식 속에선 어느덧 아랍 선교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랍어라...... 글이 무척 어렵던데..., 저 놈은 선교한다고 종횡무진 다니고 여자는 돌아다니지도 못해서 나는 쳐 박혀 양탄자나 짜고 있는 거 아냐?’ 몰래 이런 한심한 상상을 하며 말이다. 이때의 세뇌는 훗날 그 진가를 발휘하여 남미와 인도 중 선교 여행지를 택할 때 당연히 회교도들이 있는 인도를 선택하도록 했다. 물론 그땐 이미 녀석은 없는 나 혼자였지만……하지만 그날 녀석의 사역지 변경 선언은, 아니 정확히 말해서 사역지 변경 선언의 이유는 그때껏 거의 근본주의자처럼 살던 내게 충격처럼 다가온 사실이었다. 사역지를 여자 친구 때문에 막 바꾸는 데도 녀석은 하나님과 참 가까워 보였다는 기이한 사실.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그분의 친구처럼. 그건 녀석이 가진 나를 잡아 끄는 어쩌면 가장 강력한 매력이었던 것 같다. 

“왜 저 애는 항상 나보다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걸까……저 솔직함 때문일까……?”

그런 녀석의 신비감은 내게 한편으론 부러움이요 다른 한편으로 철저한 교리 중심의 나의 신앙에 의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 


[어부의 꿈]

페르시아로 가자!

황금의 어장으로

어부여

떠나자!

저들은 너의 그물을 기다린다.

테헤란의 광장에서

이스파의 왕궁에서

쿠르드의 산간 마을에서

어부여

그물을 던지자!


그리고 외치자!

광야의, 고원의 소리가 되어. -1991, 3. 18

작가의 이전글 하얀패모 이야기 36-세뇌교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