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올 날을 약속하며, 마지막 서핑!
2022.07.06
마지막 강습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날 정도로 우린 여전한 모습으로 만나 바다로 향했다. 그저 그대로인 하늘과 바다, 이 모든 풍경에서 달라진 건 우리의 아쉬운 대화들 뿐. 애써 담담한 척, 언제고 이별이란 건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면서도 왔다 가는 인연에 익숙한 척. 그렇게 마지막 18번째 강습을 시작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조류가 만만치 않게 셌다. 더하여 바람도 꽤 부는 탓에 바다 표면의 물결이 오늘따라 심하게 요동을 쳤다. 평소엔 무거운 나를 싣고도 둥둥 잘 떠있던 보드가 오늘은 들썩들썩 흔들리며 요란을 떨었다. 마치 바람과 바다가 힘을 합해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려는 듯 더욱 크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런 거라면 이만하면 됐으니 부드러운 파도를 내어달라 하고 싶었지만, 바다의 마음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니 이것도 여전히 내 몫일뿐이었다.
늘 첫 시작은 기름이 꽉 찬 오토바이의 기동력처럼 파워풀하게 패들링 하여 라인업까지 잘 들어가는데, 오늘은 시작부터 큰 파도가 세트로 연달아 들이쳤다. 강습 초반에 패닉을 겪고서 울고불고한 뒤론 한 번도 물속에서 우왕좌왕 거리지 않았거늘 오늘은 거의 죽다 살았다. 물에 빠져도 침착하고 보드와 연결된 리스 줄을 ‘하나, 둘, 셋’ 하며 당기면 곁에 온 보드를 잡고서 수면 위로 올라오면 되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양팔과 양다리를 정신없이 허우적대버렸다. 옆에 코치인 와이키가 없었더라면 또 울며 나왔을지 모른다. 이럴 땐 정말이지 혼자선 서핑을 해볼 엄두가 쏙 들어가 버리고 만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초보라면 무조건 강습이 필요한 이유다.
그래도 다행히 다시 정신을 차리고 숨을 고르며 바다가 어쨌건 이런 바다도 겪어봐야 한다고 정신을 다잡았다. 조류가 센 날은 자꾸 조류 방향으로 떠밀려가서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조류의 힘이 세서 누가 앞에서 밀고 뒤에서 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여간 스피드가 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런 날일수록 패들링 연습하기엔 딱 좋은 날이다. 라이딩 실력이 늘었어도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라인업까지 나갈 수 있는 패들링 실력이기 때문에 오늘 같은 바다도 서퍼가 되기 위해선 꼭 필요하다.
파도를 기다리며 잠깐의 담소를 나누는데 마침 나이가 지긋하신 일본 아저씨가 다가왔다. 전에 한국식당에서 한번 뵌 적이 있어 바로 알아보았다. 성격도 좋으시고 마인드도 참 바르셔서 한인, 발리인 할 것 없이 두루두루 친하신 아저씨는 20년간 이곳에서 서핑을 하셨다고 한다. 바다에서는 처음 마주치는 것 같은데, 몸이 너무 튼튼하고 좋으셔서 깜짝 놀랐다. 50대 중반은 되셨을 건데 (젊어보일 뿐 더 드셨을 수도 있다.) 저렇게 탄탄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전에 뵈었을 때 하시던 말씀이 ‘서핑 매일 해야 해. 나는 매일 달리기도 해.’ 라며 진한 자부심을 보여주셨던 게 떠올랐다. 서핑은 재미있기도 하지만 이런 존경스러울 만큼 대단한 분들이 많아서 배울 점도 많다. 젊을 때나 나이가 들어서나 건강한 사람에게선 좋은 에너지가 넘친다.
아쉽게도 오늘은 파도를 많이 타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바다가 거친 날에 두 번의 라이딩이라도 제대로 했으니 아쉬움은 없었다. 사고 없이 오늘과 같은 바다를 완수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했던 날이었다. 마지막 날에 새로운 바다를 경험한 것도 좋게 생각하면 아주 아주 좋은 추억이기도 했다.
점점 세지는 파도에 힘에 부친 팔뚝이 위협을 느꼈는지 덜덜 떨리는 걸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오늘은 이만하고 뭍으로 기어 나왔다. 2시간이 다 채워지지 않았지만 내 역량에 맞게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미련하게 무조건적으로 나를 이기려 들었던 욕심을 다시 부렸다간 바다에 혼쭐이 난다는 걸 이제는 안다. 무엇보다 내일 비행기도 못탈일을 만들어선 안되므로 아쉬워도 만족하기로 했다.
어느새 가뿐해진 커다란 보드를 들고 첨벙첨벙 걸어 나와선 바다를 향해 한참을 서있었다. 아무래도 저 멀리에 마음 한구석 두고 온 것 같은 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얼마 뒤 남편과 와이키라 잇따라 나오는걸 보고서야 가까스로 등을 돌렸다. 자리로 돌아가는 길, 선생님이 앞까지 나오셔서는 수고했다며 꼭 안아주셨다. ‘기특하다, 잘했다, 다 너 스스로 해낸 거다’ 라며 토닥토닥 등을 다독여주셨다. 18회 동안의 있었던 모든 희로애락이 그 한마디 한마디로 하여금 마음속 작은 상자에 고이 포장되었다. 정말 마지막이었구나. 감사하고 또 죄송했고 너무 즐거웠다는 말이 목구멍 끝에 걸려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 말만은 왠지 비행기 타기 직전까지 하고 싶지가 않았다.
평범하고 바쁜 하루에서 우리만 톡 하고 없어질 뿐이겠지만, 들어온 사람은 몰라도 나간 사람은 안다고, 잠시 동안은 우리의 빈자리에 그림자가 드리울 것이라 생각하니 그동안 서툴고 부족했던 점만 떠올랐다. 다시 올 것이라고 열댓 번은 말했어도 그게 언제일지 기약이 없기에, 정말 이대로 작별일 수도 있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다 같이 저녁을 먹기로 모여 그동안의 못다 한 말들과 장난을 맘껏 떨었다. 우리가 좋은 서핑을 할 수 있도록 함께해준 모든 이들과 함께 술과 음식을 먹으며, 여행 이래 가장 많이 웃은 저녁 시간을 보냈다.
언젠가 되었든 다시 서핑을 다시 하게 된다면 그전에 이번 서핑 일기를 꼭 꺼내 읽기로 했다. 모든 처음은 특별하고 소중하다. 이 마음, 이 모습으로 즐겼던 이번 발리 서핑 기록에 감사하며 여행을 마친다.
Love Bali, Stay surf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