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식주의자_한강 연작소설_창비, 흰_한강 소설_문학동네
카톡, 카톡. 카톡.
집에서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며 저녁을 먹고 있는데 계속 카톡 알람이 울렸다. 열어보니 ‘[속보] 한강 노벨 문학상 수상’ 기사 링크였다. 한강 작가님의 노벨상 수상. 괜스레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았다. 내가 한강 작가님의 소설을 뭐 읽었었지? 시집을 읽은 적은 있는데, 그때 운명에 대한 시. 그 시 제목이 뭐였더라, ‘작별하지 않는다(한강, 문학동네)’도 읽었는데, 그래, ‘채식주의자’. 그것도 읽었었지.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님의 책을 번역 없이 한글로 읽을 수 있다는 기쁨,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마음, 소설 속 이야기들에 대한 공감이 남다를 수 있다는 자부심, 다양한 마음들이 한꺼번에 밀려왔고, 자랑스러웠다. 노벨 문학상.
다음날 학교 도서관에 일등으로 가서 ‘채식주의자’를 찜해서 빌렸다. 읽었다고 생각한 책이지만, 이번 시기에 다시 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읽다 보니 읽지 않은 책이었다. 왜 읽었다고 착각했을까? 작가의 말을 보고 이해했다.
10년 전의 이른 봄, 「내 여자의 열매」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고, 함께 살던 남자는 그녀를 화분에 심는 이야기였다. 언젠가 그 변주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 10년 전의 내가 짐작했던 것과는 퍽 다른 모습이 되었지만, 이 연작소설이 출발한 것은 그곳에서였다. (채식주의자, 작가의 말, 245쪽)
내가 읽었던 책이 ‘내 여자의 열매’라는 소설이었나 보다. 그래서 착각하고 있었다. ‘채식주의자’를 읽었다고. 책을 손에 들고는 단숨에 읽었다. 술술 넘어가는 책, 그리고 이야기. 다 읽고는 한참을 고민했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에 대하여 생각하고 발견하였는가?
막상 브런치 글을 쓰려고 하니 겁이 나기도 했다. 이미 ‘맨부커상’을 받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읽은 책이며, 책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사람마다 제각각이겠지만, 서평이 많은 책이라, 내가 읽어 낸 생각에 자신이 없었다. 작가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책이 주는 주제와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이해한 것, 그걸 글로 적어도 괜찮을까, 그런 고민들. 하지만 책을 다 읽고는 내가 이해한 그대로 나는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소설이 그런 거니까.
1. 폭력에 맞서는, 또는 거부하는 방식
이대로 좀 이상한 여자와 산다 해도 나쁠 것 없겠다고 나는 가끔 생각했다. 그냥 남인 듯이. 아니, 밥을 차려주고 집을 청소해 주는 누이, 혹은 파출부 같은 존재로서라도. 그러나 한창나이에, 무덤덤했다곤 하나 결혼생활을 유지해 온 남자에게 장기간의 금욕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회식이 있어 늦게 들어온 밤이면 나는 술기운에 기대어 아내를 덮쳐보기도 했다. 저항하는 팔을 누르고 바지를 벗길 때는 뜻밖의 흥분을 느꼈다.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아내에게 낮은 욕설을 뱉어가며, 세 번에 한 번은 삽입에 성공했다. 그럴 때 아내는 마치 자신이 끌려온 종군위안부라도 되는 듯 멍한 얼굴로 어둠 속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채식주의자, 40쪽)
그녀가 살았으면 하고 그는 바랐지만, 동시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그는 의문했다.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버리려 했던 순간은 인생의 코너 같은 거였을 것이다. 아무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 강제로 고기를 먹이는 부모, 그것을 방관한 남편이나 형제자매까지도 – 철저한 타인, 혹은 적이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다시 깨어난다 한들 그 상황이 변해 있을 리는 없다. (몽고반점, 82쪽)
이 책은 연작소설이다. ‘영혜’를 둘러싼 3명의 시선이 각각의 단편으로 실려 있다. ‘채식주의자’는 영혜 남편의 시선, ‘몽고반점’은 영혜 형부의 시선, ‘나무 불꽃’은 영혜 언니의 시선이다. 각각의 삶 속에 영혜는 아내로, 처제로, 동생으로 그렇게 그려진다. 책을 다 읽고는 생각이 많아졌다. 영혜 남편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다가, 영혜 언니의 고달픈 삶에 마음이 아팠다. 예술과 본능의 경계에 서 있는 영혜 형부의 입장에선 윤리적 기준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영혜, 영혜의 상황과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폭력, 폭력적 삶의 대한 순응, 그것이 폭력인 줄 자각하지 못하는 삶. 이 책을 읽고 처음에 떠오른 키워드들이다. 사회의 문화를 벗어나 자랄 수 없기에, 우리는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어떤 문화들이 있다. 영혜가 어느 날 갑자기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은 꿈 때문이었다. 꿈에서 보이는 ‘헛간 속의 피 웅덩이, 거기에 비친 얼굴’.
어린 시절, 자신의 발을 물었다는 이유로 기르던 개를 아버지가 죽였다. 그리고는 그 개로 만든 국을 먹은 영혜,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몇 십 년이 흘러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냄새가 난다고. 늘 자욱한 연기와 마늘과 고기 냄새로 가득한 집에서 자란 영혜였다. 고기를 먹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고, 육회나 생선, 닭을 요리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영혜였다. 육식을 먹지 않기로 하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영혜의 선택에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영혜를 위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결국은 엄연한 폭력. 영혜는 그 순간 자해를 함으로써 그 폭력에 저항한다.
폭력적인 순간에 많이 노출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 그리고 부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 2004년 창작과 비평에 실렸던 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십여 년이 흐르는 사이,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긴 했어도 가족 안에서의 폭력은 여전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으며, 부부간의 사랑도 의무인 것처럼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채식주의자'의 ’그‘가 자신의 성욕을 이기지 못해 영혜의 바지를 벗기며 느끼는 뜻밖의 흥분, 그리고 결국은 멍한 얼굴로 폭력에 당할 수밖에 없는 영혜. 부부관계에서의 폭력이었다.
2. 생존의 방식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나무 불꽃, 192쪽)
지금 그녀가 남모르게 겪고 있는 고통과 불면을 영혜는 오래전에, 보통의 사람들보다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간 걸까. 잠을 이루지 못한 지난 석 달 동안 그녀는 이따금 혼란 속에서 생각해 왔다. 지우가 아니라면-그에게 지워준 책임이 아니라면- 자신 역시 그 끈을 놓쳐버릴지도 모른다고.
다만 기적처럼 고통이 멈추는 순간은 웃고 난 다음이다. 지우가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 그녀를 웃기고, 그녀는 문득 멍해진다. 어떨 때는 자신이 웃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더 웃기도 했다. 그럴 때 그녀의 웃음은 즐거움이라기보다 혼돈에 가까울 테지만, 지우는 그렇게 그녀가 웃는 모습을 좋아한다. (중략)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혔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나무 불꽃, 204쪽)
영혜의 언니, 인혜. 인혜의 생존 방식은 순응이었다. 사회와 가정이 요구하는 어떤 모습, 그 모습 그대로, 혹은 기대대로 살아내는 것. 예술을 하는 남편의 경제적 무능함에도,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그 모든 순간에서도, 동생의 자해와 입원에도 인혜는 그 자리를 지켰다.
책을 읽으면서 인혜가 들은 두 가지 답변에 대하여 생각했다. 남편이 피곤해하는 인혜에게 관계를 요구하면서 하는 말, “그냥 참아”, 그리고 모든 섭식을 거부하는 영혜가 인혜에게 묻는 말.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두 문장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오래 남았다. 인혜의 삶은 그냥 참아내는 삶이었기에 오히려 죽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죽으려고 했던 순간이 있었음을. 동생이 모든 음식을 거부하며 자신의 온 생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것이 죽어가는 길임이 분명하지만 왜 죽으면 안 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인혜는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인혜는 기적처럼 고통이 멈추는 순간, 죽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순간이 웃고 난 다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결국 사는 것이란 그토록 끔찍한 일을 겪고도 먹고 마시고, 씻고, 또 웃기까지 하는 것이라는 걸 인혜는 받아들인다.
3. 정리
노벨상 수상 심사평을 들었다.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했다. 신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고리에 관한 독특한 인식을 시적이고 실험적인 현대 산문으로 표현’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 삶의 연약함, 문화와 관습으로부터 체득된 어떤 폭력에 대한 저항, 그리고 생존의 방식. 처음 독서 감상문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땐 막연하고 어려웠는데, 글을 쓰면서 내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이다. 종종 느끼는 감정이기도 한다. 글쓰기의 힘.
‘채식주의자’를 다 읽고 바로 ‘흰’을 읽었다. 옆자리 선생님께서 ‘흰’을 다 읽고 빌려주셔서 바로 읽을 수 있었다. 옆자리 선생님께서는 ‘흰’을 읽고, “노벨문학상은 이처럼 관념을 언어로 잘 표현할 수 있어야 받을 수 있는 상인 가보다”라고 말씀하셨다. ‘흰’을 다 읽었을 때에는 ‘죽은 자’의 자리 뒤에 이어지는 ‘산 자’의 삶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었다.
참 감사하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좋은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앞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또 작가가 쓸 많은 글을 기대할 수 있어서.
[이야기 나눠 보기]
1) 한강 작가님의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왜 그 작품을 좋아하며, 그 작품의 줄거리는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했지만, 폭력이었던 그런 상황이나 사건이 있다면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지금은 그 폭력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도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