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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바라기 Apr 02. 2024

책들의 시간 79. 오늘도 그리러 갑니다.

# 앤디의 어반스케치 이야기_오창환_도트북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다. 마음은 계속 달뜨지만 시간을 내기는 쉽지 않고 막상 주말이 되면, 체력적인 한계를 마주하고 지친 몸을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봄에는 꽃구경을 가고 가을에는 단풍 구경을 가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늘 생각하지만, 뭔가를 계획하여 여행을 가지 않는 한,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그때 만난 책이 ‘오늘도 그리러 갑니다’이다. 사실, 꿈꾸어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늘 여겨왔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나에게는 그림이다. 스케치북 하나 들고, 들이며 산으로 찾아가 캠핑 의자에 앉아 주변의 풍경을 서걱서걱 그려내는 사람, 카페에 앉아 손바닥 만한 종이에 펜으로 그림을 그려내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는 참 부러웠다. 그래서 혼자서 그림 그리기를 해 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린 그림을 따라 그리기도 해 보고, 스케치 관련 책들을 찾아 읽어보기도 했지만 책으로 배우는 세상과 실재의 재능은 많이 달랐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에 대한 열망은 잠재워지지 않아, 책으로나마, 때로는 전시회를 통해 그렇게 그림 구경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은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의 어반스케치 연재 글을 다듬어 출간한 것이다. 그림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필력도 좋아 읽는 내내 재미있으면서도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졌다.      


1. 자기만의 역사가 담긴 장소


  누구나 자기만의 역사가 있다. 남에게 평범해 보이는 장소가 자신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어반스케치는 그런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다. 

  원래 서양의 그림은 인물화가 중심이다. 성경과 신화에 나오는 인물을 그린다. 유명한 <만종>을 그린 밀레는 현실에 있는 소박한 사람들을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나게 비난을 받았다. 동양화는 산수화가 중심인데, 현실에 있는 산과 강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상화된 관념을 그리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림이란 현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림이라고 하면 우리가 사는 현실과 멀리 떨어진 그 무엇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어반스케쳐스는 멀리 가 있는 우리의 시선을 주변으로 돌리라고 한다. 복잡한 상상력도 필요 없고, 어슴푸레한 기억을 되살리려고 머리를 싸맬 필요도 없다. 그냥 주변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55쪽)


  ‘어반스케치’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지만, 사실 ‘어반스케치’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몰랐다. 막연하게, 주변의 풍경을 그리는 것을 어반스케치라 부르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왔더랬다. 이번 책을 통해 정말 많은 어반스케치 모임이 있으며, 정기적으로 일정한 장소에서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어반스케치의 선언문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그게 재미있고 좋았다. 작가는 어반스케치를 주변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공간이 주는 역사를 참 좋아한다. 공간에서 함께한 시간, 그래서 공간과 시간을 공유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기억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고 믿는다. 

  남들에게는 평범해 보일지도 모르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에 대한 궁금함이 소설을 만들어냈으며, 그림을 창작하게 하고 감사하게 했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는 소설을 읽고, 그림을 감상하면서 어떤 한 장면에서 추억을 발견하고 공감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참 좋아하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상하게 한 사람하고만 가는 식당. 다른 친구들과는 잘 가지 않는데, 그 친구와는 늘 그 식당을 간다. 커다란 나무가 식당 정원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뿌연 유리, 정체성이 모호한 다양한 소품들, 오래된 가옥과 벽, 정제되지 않은 식당, 정원에 타다 만 나무 조각들, 냄새, 식당 안의 나무 식탁과 의자들, 그리고 고양이. 나무의 이름을 딴 그 식당은 예전부터 가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그 친구와 처음 갔을 때, 나는 그 식당이 좋아졌다. 

  사실 잘 모르겠다. 그 식당의 분위기가 좋아서 좋은 것인지, 아니면 음식 맛이 좋아서 좋은 것인지. 그 친구가 좋아서 그 친구와 함께 간 그 장소가 좋아진 것인지. 어느새 그 식당은 나에게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2. 도구 예찬


  프리즈마 48색 색연필은 초록색 계열이 6가지인데, 색도 예쁘지만 이름도 예쁘다. 사진에서 맨 위의 색이 ‘샤르트뢰즈(chartreuse)’다. 브랜디와 약초를 섞어 만든 술 이름인데, 프랑스 샤르트뢰즈 수도원에서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연한 연두색이다. 그다음이 ‘스프링그린(spring green)’, 봄의 새싹 같은 색이다. 그 아래가 ‘애플그린(apple green)’, 풋사과 색이다. 다음은 진짜 초록색인 ‘그래스그린(grass green)’, 풀색 초록이다. 다음은 약간 톤다운된 초록색인 ‘라임필(limepeel)’, 라임 껍질 색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올리브그린(olive green)’.

  색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색이름은 제조 회사가 결정한다. 같은 이름이라도 제조사마다 색이 약간씩 다르고 볼펜, 플러스펜, 컬러 붓펜 색이 모두 다르다. 풀이 뒤엉킨 그림을 그리려면 여러 가지 초록색을 무질서하게 덧칠해야 자연스럽다. 색연필에 볼펜과 사인펜, 컬러 붓펜으로 더 칠해준다.(32쪽)


  나는 문구에 대한 욕심이 많다. 한번 마음에 든 문구를 아주 오래도록 사용하기도 한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파인테크의 수성펜을 다 쓰고 난 뒤에 버리지 못하고 한가득 모아놓기도 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필기했다는, 일종의 자기 만족감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재작년 지역 소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다. 색연필 그림 강의였다. 그때 강사님께서 처음 권해주셨던 색연필이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프리즈마 색연필이었다. 처음 우리에게 제공된 색연필은 가장 기본적인 12색 세트였다. 근데 색감이 너무 좋고 색연필로 색칠했을 때 느낌이 좋아, 소장의 욕구가 생겼다. 그리고는 작년 초에 프리즈마 색연필 36색이 갖고 싶어서, 한참 마음이 싱숭생숭했었다. 선뜻 사기에는 가격대가 높아서, 갖고 싶다는 마음과 참자는 마음이 늘 갈등을 일으켰다. 근데 그때, 정말 좋아하는 분이 색연필을 선물로 사주셨다. 무려 프리즈마 색연필 48색. 지금도 책상에 색연필을 늘어놓고는 다이어리에 그림을 그리거나 밑줄을 긋거나 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한다. 좋다. 작가의 표현처럼 색연필의 이름도 예쁘고 색감도 좋고, 무엇보다 선뜻 색연필을 사준 참 좋은, 내게 너무 귀한 인연의 그 마음을 계속 생각할 수 있어서 좋다. 

  

  어반스케치 관련 책을 읽으면서 도구에 대한 소개와 글을 볼 때면, 나도 그 도구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님들은 이런 도구를 사용하는구나, 그런 마음도 들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아는 제조사의 도구가 나올 때면 괜스레 신나서 더 잘 살펴보곤 한다. 자기에게 맞는 문구를 발견하는 것, 글을 쓰는 사람이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나, 공부를 하는 사람이나 참 중요한 일이지 싶다.      


3. 정리


  ‘오늘도 그리러 갑니다(오창환)’를 읽으면서 그림에 마음을 뺏기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었다. 굳이 먼 곳으로의 여행이 아니더라도, 서울 나들이를 가고 싶다는 생각, 동네의 산을 오르고 싶다는 생각, 공원을 산책하고 싶다는 생각, 예쁜 카페를 찾아 나서고 싶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지도 앱에 저장을 누르면 별 모양 표시가 뜨곤 한다. 뒤늦게 그런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재미에 빠져, 내 발걸음이 닿은 곳에 ‘별 표시’를 하고, 그날 함께 있었던 사람에 대한 작은 기록을 남겨둔다. 장소에 역사를 새겨가는 기분이랄까? 


극도로 디테일을 추구하는 그림은 점점 사진을 닮아가거나 사진을 베꼈다는 의심을 사게 된다. 디테일의 딜레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스타일’이다. 디테일을 추구하더라도 작가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좋은 그림이 된다. 어떤 작가가 스타일이 있고 없고를 구별하는 쉬운 방법이 있다. 여러 사람의 그림을 모아 놓고 그중 어느 작가의 작품인지 쉽게 알 수 있으면 그 사람은 스타일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그가 꼭 좋은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148쪽)


  책에 나온 어반스케치에 대한 작가의 말처럼 ‘스타일’을 갖춘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지 싶다. 그것이 그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살아가면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 또는 발견해 나가는 것, 그리고 만들어 나가는 것, 그건 나이가 들수록 삶의 여정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 이 책은 어반스케치 그림에 대한 책이지만, 어떤 장소들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며, 어반스케쳐스들의 일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모임과 활동을 소개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일상적 공간의 새로움을 느끼게 만들어 준다. 내가 그림에서 전혀 재능을 발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런 그림과 글을 읽을 수 있어 참 좋다, 그리 느낀 하루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자기만의 역사가 담긴 장소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떤 장소를 그림으로 그리고 싶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특별히 좋아하는, 또는 애착을 가지고 있는 도구들이 있다면, 어떤 종류의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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