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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a soleado Mar 13. 2023

기억이 또 미화되었다

늘 그래왔듯이.

몇 년간의 외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건 둘째 출산을 약 두 달 정도 앞둔 시점이었다.


일을 위해 잠시 콧바람 쏘이는 기분으로 나왔던 해외생활 중 남편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을 하게 되면서 앞으로의 우리의 삶이 영영 이곳에 뿌리내릴 것 아니라면 하루라도 더 젊을 때 한국으로 돌아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불안감이 나를 엄습해 왔고, 남편을 설득해 결국 이곳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신혼살림으로 마련해 약 3년 정도 사용했던 가전과 가구, 온갖 집기와 소품들을 중고로 팔아보다가 나중에는 시간에 쫓겨 헐값에 넘기거나 그냥 나누어주거나 등등 했으므로 당시 친구들은 우리를 기부천사라 불렀다.


귀국 후 친정에 임시로 짐을 풀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하루라도 빨리 우리 세 식구만 있을 수 있는 집을 얻어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져 왔다. 30년 가까이 살았어도 시집을 가 이미 떠나 온 친정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편안함이 아니었다. 8월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남편은 이제 15개월 된 첫째 아이를 힙시트에 앉혔고, 나는 한껏 불러온 만삭의 배를 끌어안았다. 당시는 아직 차가 없을 때였으므로 두 사람이 그렇게 한여름 더위를 온몸으로 마주하며 부동산을 전전했다. 열심히 발품을 판 덕분에 우리는 약 한 달여만에 우리만의 보금자리로 이사할 수 있었다.




새로 이사한 곳은 나와 연고가 없는 동네였다. 나는 친정이 있는 그 도시에서 거의 나고 자란 수준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그 도시를 새 거주지로 정했지만 당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예산에 맞추다 보니 그중에서도 점점 밀리고 밀려 같은 도시 안의 외딴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동네에는 작은 아파트 단지 몇 개가 모여 있었고 우리집은 가장 초입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아파트 정문 앞에 그 동네의 유일한 마켓인 이마트에브리데이가 하나 있었는데, 매월 마지막주 일요일에 그 가게가 문을 닫으면 동네 전체가 생동감을 잃은 느낌일 정도로 동네에 뭐가 없었다. 빵집도 하나 없었고, 나중에서야 옆 언덕베기에 있는 아파트 상가 내에 세탁소와 약국 등등이 있는 것을 발견했고 종종 이용했다.


새집은 약 25년 정도 된 노후 아파트였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청소의 유무로 해결되지 않는  지독한 연식이 드리운 집이었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나름 안락한 보금자리를 만들어가며 둘째를 출산했다. 그 집의 가장 큰 장점은 따뜻함이었다. 남향집이라 해가 잘 들었고, 무엇 때문인지 집 내부에 물리적인 온기가 가득해서 11월에도 해가 바짝 드는 시간에는 이따금 선풍기를 돌렸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은 한겨울에도 매일같이 욕조 물놀이를 했고 집 안은 늘 따뜻했다. 그 집의 최대 단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주차장이 협소해 저녁 7시 이후에 귀가하는 차량은 복잡한 이중주차를 각오해야 했고, 9시가 넘으면 그마저도 어려웠으므로 줄곧 신데렐라의 삶을 살았던 것. 그리고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층간소음이었다. 자세히 떠올리기엔 꽤나 힘든 기억이었으므로 구구절절 설명은 그냥 생략하기로 하고.... 이따금 자려고 누운 아이가 윗집의 쿵쿵 소리가 무섭다고 할 때면 마음이 참 어려웠고, 한 번은 우리 아래층에 사시는 아주머니께서 밤중에 애들 좀 조용히 시키라고 성난 손가락으로 우리집 벨을 눌러서 문을 열었는데 이미 우리 아이들은 1시간 전부터 꿈나라를 여행 중이던, 그냥 그런 일도 있었다.


그곳에서 2년이 조금 넘게 살았다. 처음에는 불편한 것이 많았지만 나름대로 또 적응을 했다. 그러고는 생각보다 짧았던 한국에서의 시간을 정리하고 또다시 국제 이삿짐을 쌌다. 셋이서 탔던 비행기를 이제 넷이서 타고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더 기부천사가 되어 보는 경험을 하였고,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다녔던 어린이집 친구 중에, 하원하고 나서도 동네 놀이터에서 다시 만나 종종 놀던 친구네가 있었다. 아이의 첫 번째 친구였고, 나에게도 아이를 통해서 만나게 된 첫 번째 학부모였다. 토요일 출국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는 금요일까지도 여전히 온 집을 꽉 채우고 있는 짐 속에서 분초를 다투고 있었지만, 그 주 내내 하루마다 처리해야 할 일들 탓에 내일로 또 내일로 미루고 있던 그 친구와의 작별인사를 이제는 미룰 날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시 아이들을 데리고 약속 장소인 놀이터로 나갔다. 함께 만나 여느 날과 같이 뛰고 미끄럼틀도 타며 시간을 보냈다. 초콜릿과 음료수를 나눠 먹으며 즐거운 사진도 남겼다. 아이들은 헤어짐을 잘 알지 못했다. 먼 나라로 이사가게 되어 이제 만날 수가 없다고 설명해 주었지만 그 이별이 아이들의 마음에 와서 닿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정이라는 건 생각보다 강력했다. 헤어짐을 실감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깔깔거림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마음은 그새 꽤나 서운해져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나도 친구네도 아이들의 노는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다시 와서 약 6개월 만에 나는 핸드폰을 오토바이 날치기 당했으므로 백업해 두지 않은 그날의 애틋함은 기억 속에만 남은 채로 사라지고 말았다.




얼마 전 그 친구네 엄마와 오랜만에 안부를 주고받다가 사진을 좀 부탁했다. 그리고 오늘 그날의 사진과 동영상 몇 개가 카톡으로 전송되었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지금까지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가며 구구절절 쓴 것이다.


사진 속 아이들의 모습은 여전해 보이면서도 지금보다는 어린 티가 많이 났다. 그리고 아이들 뒤로 보이는 익숙한 골목 풍경과 편의점, 나무와 아파트들. 순간 뭉클한 마음이 훅 밀려왔다. 그 감정은 정확지 않은 흡사 그리움인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뭐랄까..  곧 비가 왁 하고 쏟아지기 직전의 눅눅함과 어두움이 잔뜩 내려앉은 공기 같은 그런 류의 그리움이라고 할까. 이곳은 여전하겠지, 우리가 여전히 저곳에 있다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사진 속 풍경을 다시 걷고 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존재와 부재에 대한 생각이 안겨다 주는 이질적인 느낌을 힘껏 들이마시려 애쓰며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 아이들이 아닌 그 뒤로 펼쳐진 공간과 시간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돌아간다면...?'이라고 떠오른 그 생각의 흐름이 나에게 분명한 문장 하나를 남긴다.


'기억이 또 미화되었다.'


사진 속 풍경 안에서 살아갈 때 나는 꽤 많이 힘들었었다. 멀쩡하게 직장 생활하던 젊은 부부가 나란히 일을 내려놓고 새 정착을 찾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다시 취준생이 되었고, 그때 우리에겐 두 돌도 되지 않은 연년생 아이 두 명이 있었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니고 쉬어도 쉬는 게 아니라는 표현이 매우 적절했던 날들이었다. 울과 근심 그 자체였던 취준의 시간 끝에 남편은 뜻하지 않게도 다시 해외취업을 하게 되었다. 코로나 시작 그즈음이었다. 3-4개월 여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헤어짐의 시간은 1년 7개월까지나 이어졌다. 아기침대에서 버둥거리며 아빠와 잠시의 이별인사를 했던 둘째 아이는 두 발로 뛰어다니며 아빠와 재회했다. 이제 목을 가누기 시작하던 아이가 말로 의사소통하게 되기까지의 시간을 온 가족이 함께 견디고 견디었던 것 같다. 4시에 아이들을 하원시켜 좀 돌보고 있으면 남편이 7시쯤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는 삶- 그 일상이 꿈이 되었다. 그 기억은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사진을 보자마자, '아, 여기. 그립다. 여전하겠지, 가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다니.




어쩌면 삶은 잊히기 때문에 이어질 수 있는 것일까. 하긴. 당장 내일부터 남이라 해도 이상스럽지 않을 만큼의 부부싸움을 일일이 기억한다면 그와 내가 오늘 어찌 또 깔깔거리며 한 식탁에 마주 앉을 수 있을 것인가. 잊힘은 좋은 것이다. 잊힘 끝에 남은 미화된 기억도 좋은 것이. 그래서 우리 만날 때마다 그 지긋지긋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야자 이야기를 그렇게 되풀이며 즐거워하는 것이겠지!


기억이 미화되었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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