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깊은 감동을 받은 여행지여도 시간이 흐르고 일상에 치이다 보면 당연히 그 기억은 흐려진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니 포르투의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매료시켰는지 구체적인 기억은 흐려졌다. 분명히 나는 포르투를 너무나 좋았던 여행지로 기억하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최근 뮤지션들이 유명한 도시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TV 프로그램인 '비긴 어게인'의 배경으로 담긴 포르투를 우연히 보면서 단숨에 기억해낼 수 있었다. 6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자그마치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졸업까지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동안 잊고 있었던, '포르투에서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포르투는 밤하늘의 색에도 깊이가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던 곳이었다. 그저 까만 밤이 아니었고, 그저 반짝거리는 야경이 아니었다. 밤하늘을 이루는 어두운 색은 한 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마치 그라데이션된 것처럼 깊이와 채도가 서로 달랐다. 밤하늘 곳곳에는 저마다의 크기와 밝기를 가진 도시의 조명이 흩뿌려져 있었다. 한 도시의 밤이 그야말로 노래처럼 '들려왔다'.
노래처럼 들려왔던 포르투의 밤하늘과 조명
시력을 포함한 오감의 능력치가 높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도 맑아지고 머리 회전도 빨라지는 것 같았다. 걸음 하나에 생각이 실리고, 눈에 스치는 풍경 하나에도 해석이 더해졌다. 함께 간 친구가 애틋하게 느껴졌고, 단 한번밖에 없을 20대의 한 페이지를 함께 보내주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날 아침 친구와 싸웠다가 화해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밤하늘, 이 아름다운 도시, 그리고 이 고마운 사람의 존재가 또렷하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포르투에서 처음 깨달은 건 밤하늘의 색채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날 밤 새삼 내가, 그리고 친구가 '젊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때는 2012년 5월, 스물네 살이던 나와 친구는 마지막 대학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친구는 스페인어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 스페인에 가고 싶어 했다. 대학 내내 그 친구와 거의 한 몸처럼 붙어 다녔기 때문에 나도 스페인에 가고 싶었다. 우리는 거의 즉흥적으로 스페인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포르투갈은 사실 다들 가길래 우리도 끼워 넣은 여행지였다. "스페인 가면 가까워서 포르투갈도 갈 수 있는데 되게 좋대." "그럼 우리도 가자". 아마 이 정도 수준의 대화를 했을 거다.
그렇게 우리는 도서관에서 전공서보다도 여행 가이드북을 더 열심히 보며 약 한 달 후에 떠날 여행을 준비했다. 마드리드에서 세고비아와 똘레도, 꼬르도바, 그라나다, 론다, 말라가, 세비야에서 리스본과 포르투를 거쳐바르셀로나까지 이어지는 코스를 짰다. 갑작스러운 시험일정 변경으로 친구가 하루 먼저 스페인에 도착하고 나는 그다음 날 밤에 도착하는 등 몇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우리는 각자의 기말고사 일정이 끝난 바로 다음날 무사히 마드리드로 날아갈 수 있었다.
여행은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고 유익했다. 맨 길바닥에다 날계란을 깨 보면 프라이처럼 익어버리는 엄청난 무더위마저 즐거웠다. 거대한 무언가에 압도당하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취향을 제대로 관통해버린 론다의 협곡에 감탄하며 '이 누에보 다리를 지키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감상을 공유했다. 그라나다에서는 미리 알람브라 궁전 입장 티켓을 예약하지 못해 입장권을 사려고 꼭두새벽부터 바닥에 주저앉아 줄을 서가면서도 웃음이 끊이지가 않았다. 30대가 된 지금은 누가 가라고 돈을 줘도 가기 힘들 것 같은 다소 불편한 침구와 세면시설, 온갖 국적의 여행자들 여러 명과 뒤엉켜야 하는 호스텔은 아늑하기까지 했다.
스페인을 잠시 떠나 포르투갈로 오니 여행의 즐거움은 클라이막스에 다다랐다. 메인이었던 스페인 여행에 약간 꼽사리처럼 끼워 넣은 곳이었고, 사람들이 좋다고 하니 그럴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아름다울 줄이야. '빈티지'라는 표현은 포르투갈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말 같았다. 심지어 리스본에서 묵었던 굿모닝호스텔의 경우엔 숙소의 분위기와 위치, 스태프와 함께 묵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 매일 아침 와플을 무제한으로 구워주는 서비스까지 완벽하였기 때문에 여행의 만족도를 배가시켰다. 그 만족감은 리스본에 이어 포르투까지 이어졌다.
감동적이었던 포르투의 첫 모습
학생이었기에 최대한 아끼는 여행을 했던 우리는 포르투첫날, 호스텔에 붙어있는 광고 전단을 보고 현지 대학생들의 재능기부로 이뤄지는 free walking tour에 참여했다. 걸어다니면서 도시 곳곳의 명소를 그들의 가이드와 함께 반나절만에 둘러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포르투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다. 붉은색 지붕이 촘촘하게 모여있는 나지막한 스카이라인도, 푸른 강 위를 지나는 철교도 무엇 하나 빠질 것 없이 인상 깊었다. 심지어 나는 그날 다이어리에 "만약 유럽에서 살게 될 일이 있다면 1순위는 물론 껑이지만(내가 교환학생으로 있던 프랑스의 소도시), 2순위는 여기로 정했어."라고 적어두기까지 했다.
포르투의 오래된 길거리엔 그 도시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현지인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포르투의 건물들은 포르투의 대표 음식인 '프란시스나'의 색을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여행의 즐거움이 흐트러진 건 그다음 날 아침이었다. 모든 싸움이 그렇듯 그날 신경전의 시작도 사소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원래 계획대로 강 건너편의 와이너리를 체험하고 싶었고, 친구는 전날 우리와 함께 야경을 본 벨기에 남자애들과 해변에 가고 싶어 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오전에 해변에 갔다가 와이너리는 오후에 간다던가 하는 식으로 충분히 타협할 수 있는 문제인데도 우리는 결국 부딪히고 말았다. 감정이 상해버린 우리는 서로 쌩하니 지나치고는 각자 목적지로 떠나버렸다. 짜증이 난 것은 물론이거니와, 친구끼리 여행 가면 반드시 싸운다는 말은 우리에겐 안 통하는 말인 줄 알았건만 우리도 여지없이 싸워버렸다는 사실에 자존심까지 상했다.
나는 호스텔에서 만난 로사냐라는 여자분('여자애'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사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왕언니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과 함께 와이너리 투어를 하러 갔다. 와인에 대해서는 지금이나 그때나 지식이 0에 수렴하고, '맛있다 or 맛없다'만 구분하는 단순한 입맛을 가진 사람으로서, 와이너리 투어에 대한 소감 역시 '오 신기하다', '와인의 종류가 정말 여러 가지구나', '와인통은 정말 통아저씨 찌르는 장난감 그 통이랑 똑같이 생겼네' 정도에 그쳤다(...).
와이너리가 모여있는 강변에서 바라본 포르투의 모습은 또 색다르다.
포르투는 첫날보다도 더 아름다웠고, 강변으로 내려가서 보는 도시의 모습은 더욱 색달랐지만 마음 한구석이 계속 찜찜했다. 그러나 친구랑 싸웠다는 이유로 우울해하기에는 포르투는 지나치게 멋진 곳이었다. 심지어 질릴 때까지 포르투의 강변을 거닐다 보니 찜찜하던 기분이 상당 부분 해소되기도 했다. 나와는 달리 주머니 사정이 풍족해 보였던 로사냐는 그날 점심으로 스테이크를 사주기까지 해서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스테이크는 매일 마트에서 파스타 면과 소스를 사 와서 직접 끼니를 해 먹으며 식비를 아껴야 했던(심지어 남은 면은 고이고이 다음 여행지로 싸들고 다니기까지 한) 우리로서는 먹을 수 없는 예산 범위의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후 느지막이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나는 마음이 많이 무거워졌고, 이게 뭐라고 싸워서 하루를 찜찜하게 보냈나 싶은 후회감에 휩싸였다. 오전만 해도 '사실 난 너한테 별로 안 미안하고 짜증만 나'는 마음이었는데 오후가 되니 그저 '미안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었다. 침대로 기어들어가 친구에게 사과하는 편지를 썼다. 친구가 이미 와있었는지, 아니면 내가 편지를 쓰는 도중에 친구가 들어왔는지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우리는 서로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편지를 쓰느니 그냥 지금 미안하다고 말하면 되는데, 그러자니 그건 또 너무 어색해서 그냥 편지를 이어 썼다. 근데 편지를 쓴 건 나만이 아니었다. 친구도 나한테 미안하다는 편지를 써줬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조용하게 편지로 화해를 하고, 조금은 누그러진 마음으로 저녁을 또 차려먹고, 마지막 포르투 야경을 보러 나갔다. 우리는 다시 평소처럼 대화하려고 애썼지만 우리의 한마디 하마디에는 숨길 수 없는 어색함과 조심스러움이 묻어있었다. 너도 오늘 나처럼 조금은 찜찜한 하루를 보냈구나. 미안하고 짠한 마음이 몰려왔고, 또 한편으로는 서로의 마음이 통한 것 같아 기쁘고 고마웠다.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며 고개를 드니 내 앞엔 포르투의 밤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은 포르투에서의 마지막 밤이니까 후회 없이 이 밤을 눈에 담자는 생각이 가득해졌다. 부끄러워서 차마 그렇게는 말을 못 했지만 조금 앞서가는 친구를 붙잡고 이 곳을 앞으로 어디에선가 보고 듣고 기억할 때마다 너랑 유치한 이유로 싸웠다가 사춘기 소녀들마냥 편지를 주고받으며 화해했던 오늘이 기억날 거야,라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감수성이 차오를 수밖에 없는 그날, 포르투의 밤하늘과 조명은 그 감수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던 것 같다. 그날 무엇에든 쉽게 자극받고 감명받을 수 있고, 예전엔 그저 '예쁘구나'하고 지나쳤던 것들의 아름다움을 더욱 섬세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 젊었건만 평소엔 그다지 인지하지 못하고 지냈는데(사실 매번 그렇게 느끼는 건 오글거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날은 유독 그 사실이 실감 났다.
이 아름다운 도시의 밤하늘 밑에서 젊은 우리는 말그대로 유치하고도 찬란한 청춘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포르투 강변과 길거리에서 노래를 하는 비긴 어게인 속의 그들을 보며 포르투에서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났다. 처음으로 밤하늘의 색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과 존재들에 대해 풍성하게 느낄 수 있었던 젊었던 그 날이 떠올랐다. 그 청춘이 그리웠다..... 응?
나는 아직도 젊다. 생물학적인 나이도, 그때보다야 다소 노화가 진행되었겠지만 어쨌거나 내 외적인 모습도 젊다. '어린 나이'를 그리워한다면 모를까(물론 그거야말로 무척이나 그립다) 청춘을 그리워하기엔, 당장 지금의 내가 아직 창창하게 젊은 사람이다. 근데 왜 나는 그때처럼 내가 젊다고 느끼는 순간순간이 줄어든 것 같을까. 왜 그때처럼 사소한 순간과 풍경을 풍부하게 느끼는 것 같지 않을까.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포르투가 아니라 서울이라서?
혹시 흐려졌던 건 포르투라는 여행지에 대한 기억들이 아니고,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의미있는 존재를 생생하게 실감하는 '감각'은 아니었을까. 몇 살 더 먹었다고, 사회생활 연차가 몇 년 좀 찼다고 어른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치여 지내다가 청춘의 감각이 무뎌진 것 아닐까. 그래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포르투를 보면서 생각했다. 다시 포르투에서 실감했던 그때 그 젊은 시절처럼 내 주변의 풍경을 풍성하게 느끼면서 살고 싶다고 말이다. 그래서 포르투가 아닌 서울에서도 불현듯 내가 '젊은 존재'임을 자각할 수 있도록.
참고로 덧붙이자면 여전히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친구다.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 서로 다른 영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만나는 빈도는 줄어들었지만 언제 만나도 즐겁고, 의지가 되는 존재다. 우리는 아직도 종종 우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 중 길거리에서 나눴던 수많은 웃긴 일들을 곱씹으며, 시간이 남아돌았던 그때 좀 더 여행을 했어야 한다고 아쉬워한다.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 동안 있던 수많은 일들 중에서,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은 역시 가장 이야깃거리를 많이 남긴 빅 이벤트였다.
그리고 그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했던 것처럼, 정말로 나는 어디선가 포르투에 대해 보거나 들으면 우리가 싸웠다가 편지로 화해한 그 일을 생각한다. 우리 그때 정말 어리고 귀여웠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기도 하고, 그런 추억을 가진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괜히 든든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말인데 친구도 나도, '젊은 존재'인 우리 모두 재미있고 후회 없이 일상을 살아나가면 좋겠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지치게 되면, 기말고사 끝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마드리드로 날아갔던 스물네 살 그때처럼 다시 신나게 여행을 떠나면 되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그렇지만 타고난 게으름을 이기지 못하고 가끔은 경치 좋은 곳에서 그저 멍 때리기만 하는 사람의 여행기. 세상은 넓고 기웃거릴 곳은 정말 많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