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의 세계
사람에게 치이고 일에 치이고 세상 어느 하나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나는 집에 와 내 방 침대에 누워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직사각형의 물체를 집는다. 그 조그만 네모난 세상은 내게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다. 책은 내게 만능 선생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챗GPT 같은 느낌이려나. 시간만 있으면 나는 책을 집어 들었다. 책 속으로 파묻혔고 책은 고요히 나를 위로하고 웃기고 숨 쉬게 해 주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읽고 싶은 책이 많아졌다. 매해 더 많은 책들을 읽지만 욕심은 채워질 줄 몰랐다. 모두가 책 읽는 사람을 선망하고 세상은 독서를 장려했으므로 나의 행위에는 더욱더 가속도가 붙었다. 매년 커져가는 욕심에도 잘 산다고 자위할 수 있었다. 그 대상이 단지 ‘책’이라는 이유만으로.
책을 많이 읽을수록 머리는 점점 커져갔다. 이상은 커져가고 이론은 단단해져 갔다.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할까. 맞고 틀리다의 기준이 공고해졌다. 현실보다는 책 속이 편했다. 그 안에서는 옳고 그름이 분명했고 완벽한 논리를 세우고 완성된 세상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높아진 이상에 비해 나의 현실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 건 최근이었다. 구조나 처우의 문제와 같은 불합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하며 합리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과의 괴리는 커져갔다.
본가에 살 적 집에서 틈만 나면 책만 읽는데 어느 날은 눈치가 보였다. 부모님을 도와 밥상을 차리거나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 없이 그저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그랬다. 부모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눈치를 준 것도 아니었다. 컴퓨터나 핸드폰 하지 않고 책을 보는 것 자체로 부모나 나나 ‘책을 보니까…’하며 위안 삼고 이해하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때로 소통 없이 아무런 움직임 없이 눈만 깜박거리며 책 읽는 딸아이가 답답하거나 걱정되진 않았을까. 적어도 나 스스로는 그랬던 것 같다. 눈만 끔뻑대며 책을 읽는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본가에서 독립한 지금도 양상은 달라졌지만 문제의 본질은 비슷하다. 일터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보수를 받는 만큼의 역할을 해내는 일, 집에서 청소와 빨래와 같이 아주 사소한 일, 주변 사람들과 현명히 의사소통하며 관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 등 턱없이 다른 사람보다 힘들어할 때가 많다. 취약한 것은 더 취약해졌고 삶을 유지시키는 아주 중요한 것들에 고루 영양분이 가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다.
책에 몰두하는 사이 그렇게 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 콧대는 높아지고 현실의 생활은 점점 작아졌다. 나는 지식인이었고 머릿속만 꽉 찬 사람이었다. 꽉 찬 머릿속을 비우지도 말로 내뱉지도 못해 글을 썼다. 나의 글들은 거의 항상 응원을 받았고 나의 위상을 높였다. 역시 글 쓰는 애는 달라. 뭔가 멋지지 않니? 그럴수록 난 내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다. 역시 난 달라. 나라는 존재 멋지지 않아? 나의 생활은 쪼그라들고 자의식만 커져갔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책만 읽었다. 그러는 와중 친한 친구 여럿을 잃고 애인과는 자꾸만 이별했으며 직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구석에 빨래와 각종 짐들이 어지러이 쌓여갔다.
각성이 필요했고 결론은 하나였다. 안전지대를 탈피해 몸을 움직이는 것. 머리는 어느 정도 찼으니 몸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그런데 안 하려던 걸 하려니 여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동기부여하는 데까지 다시금 책의 힘을 빌렸다. 하나씩 그리고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동하기, 산책하기, 일기 쓰기, 차 마시기, 필사하기, 청소하기. 몸을 움직이다 보면 생각이 단순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에 이리 좋은 일이 있었구나. 몸의 움직임을 그동안 너무 과소평가하며 살았다! 몸과 마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마음의 변화에만 늘 예민했지 몸의 변화에는 무감했던 지난날을 반성했다. 갈대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의 변화에 몸도 같이 픽픽 쓰러졌다. 장이 좋지 않으면서도 곱창, 삼겹살, 매운 음식을 좋아라 하며 서슴없이 섭취하고 장에 좋다는 유산균 하나 제대로 찾아보지 않았다. 생리 주기를 표시해놓지 않아 매번 급작스럽게 그날을 맞이하고, 말랐다는 이유로 운동을 시작하거나 꾸준히 한 적이 없었다. 조금만 피곤해도 잠을 자는 것, 그것이 내가 몸에 해준 유일한 일이자 잘한 일이었다.
앞으로 더 계속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청소와 빨래를 하고 꼼꼼히 구석구석 내 몸을 닦고 씻고 침구를 정리 정돈하고 밖에 나가서 좀 더 자주 걷거나 달리는 일. 몸을 움직이고 관리하는 일에 이전보다 많은 시간을 쓰고 주의를 기울이고 싶다. 몸은 곧 마음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몸을 관리하는 일이 곧 마음을 관리하는 일이고, 마음을 관리하는 일이 곧 나의 관계와 일과 생활을 관리하는 일이다.
여전히 나는 자주 유혹에 빠진다. 침대에 누워 눈알만 굴리며 책 읽는 게 세상에서 가장 편하다. 심지어 이 쉬운 일을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여긴다. 여전히 힘들 때마다 책에 기대곤 한다. 책에서 위안을 얻고 책으로 도피를 한다. 대신 요즘엔 거대한 이야기 말고 자잘한 것에 집중한다. 한 끼 잘 차려먹는 법, 타인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 오해 없는 말투 사용법 등. 계속 책을 읽을 거라면 이왕이면 몸을 움직이고 생활에 밀접한 내용을 가까이하고 흡수한다.
이전의 습성대로 돌아갈 때마다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다짐한다. 춥지만 밖에 나가서 러닝을 해야지, 오늘은 분리수거장에 쓰레기를 버려야지, 졸리지만 자기 전에 나의 하루를 기록해 봐야지. 조금씩 나의 삶을 마주하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스스로를 단련시키며 생활의 감각을 익힌다. 사각형의 안전지대를 탈피한다. 단단해지는 법을 배우고 내 삶을 껴안는 일에 한층 더 다가선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