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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eezip Aug 04. 2022

다운그레이드, 어른들의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



“여보세요. 동대문에서 원단 가는데, 거기 위치 좀 알려주세요”

“네, 여기 서울시 중랑구 동일로..”

“아니 주소 말고 위치요”

“아, 네. 여기 옛날 중랑경찰서 아시죠? 거기서 태릉 방면으로 가다 보면 왼편에 편의점이 있어요, 거기서~@#%^&“


원단시장에서 출발하시는 퀵 기사님들은 종종, 아니 거의 꽤 매번 이렇게 위치를 물어보신다. 처음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소로 검색하면 쉬운 걸 요즘 네비가 얼마나 잘 돼있는데. 근데 어른들이 소통하는 방식은 지도가 아니라 위치였다. 원단시장 퀵 기사님들 머릿속엔 서울 지도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길이 훤히 보이시는지 설명을 드리면 그 길 그대로 찾아오신다. 마지막 공통질문은 건물 1층에 뭐가 있는지 물어보시는데, 그 멘트가 항상 똑같다.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 5시, 또 다른 전화가 왔다.


“거기 위치 좀 알려줘요, 근처에 지하철 무슨 역이 있어요?”

“아 대중교통으로 오세요..?! 여기 지하철 7호선 먹골역 근처예요.”

“몇 번 출구예요?”

"아 여기는요~@#$%!#^"


이번엔 어르신 택배였다.

버스로 한 시간 거리를 오시는 동안 3번의 전화가 왔다.


어디서 꺾어야 하는지, 거기서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어떤 길이 더 빠른지 설명을 드리다가 결국 마중을 나갔다. 기다릴까 마중갈까... 솔직히 3번 고민했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오시는 모습을 상상하니 나가는 게 맘 편하다 싶었다. 근데 딱 한 블록 마중 나갔을 뿐인데, 고맙다며 정말. 엄청. 좋아하셨다. 수령했다는 사인을 해드리고 샘플 원단이 든 봉지를 받아 드는데 시골에 계시는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우리 할아버지는 평창에서 1년에 두 번 배추 농사를 지으신다. 온몸이 성치 않으신 80대 연세에 ‘올해가 마지막 배추다’란 말만 5번 갱신하시면서 매년 배추를 심으신다. 수확철이 되면 배추 한 트럭이 우리 동네로 들어오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나눠가져 가면서 할아버지께 음식과 용돈을 선물하는 연간 행사를 치른다.

할아버지께 누가 부탁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매번 또 밭을 갈고 심으신다. 배추와 함께 할아버지의 한 해를 농사짓고 계시는 게 아닐까.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기까지의 1년을 오롯이 보내며 '배추 잘 먹었다'라는 한 마디에서 성취감과 보람을 느끼시는 듯했다. 어르신들은 그런가 보다.


어르신 택배를 받는 건 기다림이 필요한 일이다. 지도 한 번 찍으면 쉽게 찾아올 길도 3번씩 설명을 드려야 한다. 그럼에도 배달하고 돌아가시는 뒷모습을 보면 괜히 따뜻한 느낌이 든다. '오늘 배달도 이걸로 끝이네요'란 한마디에 가치 있는 하루를 보냈다는 마음이 전해졌다. 각박한 현실에서 아주 잠깐이나마 온기를 느꼈던 순간이었다.




다운그레이드

어른들의 세상을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도에 검색하면 되는 걸 위치를 하나씩 물어가고
엑셀로 뚝딱하면 쉬운 덧셈을 계산기로 두드리고
수기 세금계산서 종이를 받아서 사진을 찍어 세무사로 보내고
전화번호부 수첩에서 소개해 줄 공장 전화번호를 찾고
한 뭉치 가득 있는 종이 출력물에서 정보를 찾는 것



물론 업그레이드를 따라가기도 바쁜 세상에서 다운그레이드를 하는 건 쉽지 않다.


우리들의 세상으로 어른들을 불러들이려는 시도를 해봤었다. 작업지시서를 스캔해서 아이패드에 넣어주고 검색 기능을 알려드렸는데, 반나절만에 다시 종이를 찾으셨다. 또 얼마 전 조합 회의에서 나염공장 딸인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우리 아빠는 카카오 택시 부를 줄 알면서도 나한테 전화해서 불러달라고 시키신다? 앱 쓰는 것보다 나한테 말로 하는 게 더 편하니까’라는 말에 극강 공감을 하면서 맥주잔을 부딪쳤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노력을 하거나 말거나 어른들만의 세상은 꽤 평화롭다. 효율보단 성실하게 온전히 그 업무를 수행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세상에선 '오지랖'으로 불리는 일들도 어른들의 세상에선 '정'으로 표현된다. 버전 패치를 하기 나름인가 보다. 나도 나이 들면 똑같아지겠지. ‘알잘딱깔센’ 단어도 어려워서 한 번에 못 말하는데 역지사지하자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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