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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일근 May 29. 2022

그램의 언박싱 감동

포장도 제품의 일부

포장도 제품의 일부


제품의 개발과 생산에 집중하다 보면 포장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간과하는 경우가 꽤 있다.  내가 TV연구소장으로 재직할 때도 포장에 관해서는 어떻게 하면 비용을 줄일지가 논의 주제였다.  2010년 무렵에는 TV가 그렇게 수익률이 높은 사업이 아니었다.  영업이익이 매출의 3~4%에 불과했다.  그러니 매년 어떻게 하면 비용을 절약할지 고심했고,  포장박스의 제작비를 줄이는 것도 이런 노력 중의 하나였다.


TV의 경우에 포장박스는 배송단계까지만 필요하지 설치 후에는 버려지는 물건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싸게 만들려 하고,  당연히 박스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고객 역시 TV의 포장박스에는 관심이 없다.

PC사업도 같은 본부에 속해 있어서 마찬가지였다.  노트북의 포장박스도 저렴한 누런색 판지로 만들고 있었다.  나는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읽으면서 포장박스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했다.  소비자가 상품을  살 때 최초로 접하게 되는 것이 포장박스다.  특히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새로 살 때는 뜯기 전의 포장박스가 주는 설렘과 감흥이 있다.  다른 분야이긴 하지만 샤넬이나 헤르메스 같은 명품들은 제품보다 포장에 먼저 감탄하곤 한다.  고급스럽고 멋진 포장박스를 개봉할 때 느껴지는 흥분과 즐거움 역시 상품가치의 일부가 아닐까?


언박싱(unboxing)의 감동을


당시 LG 노트북의 포장은 이런 감동을 전혀 주지 못했다.  디자인적 고려는 전혀 없는,  그저 제품의 포장 기능만 지닌 싸구려 박스였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프리미엄 제품을 지향하는 그램이니 만큼 포장도 애플 맥북의 수준은 되어야 했다.


나는 포장박스의 디자인을 새로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담당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왜 비싼 비용으로 고급 포장박스를 만들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명품이 되려면 포장도 제품에 걸맞아야 한다고 설명해줬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경험 상 이런 경우는 설명을 더 해봤자 소용이 없다.  나는 무조건 그렇게 해오라고 강제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도는 지금까지 LG의 PC사업부 누구도 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고급스러운 포장박스에서 더 나아가  그램을 넣어서 들고 다닐 수 있는 가죽 파우치도 제작했다.  시판 초기 그램은 얇은 가죽 파우치가 함께 들어 있어서 휴대 시에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해 보였다.  요즘은 고급스러운 포장이 보편적이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사소한 디테일까지,  프리미엄의 완성


그리고 노트북의 밑면도 더욱 완벽하게 손보았다.  제품의 규격인증과 제품번호가 인쇄된 종이 라벨이 붙어있어 미관을 해치고 있었다.  나사와 홀이 없어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을 손상시키고 있었다.  종이 라벨도 없애라는 지시에도 담당자들의 저항이 있었다.  라벨을 없애려면 제품에 직접 인쇄해야 하는데 생산라인에 인쇄설비를 추가하는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투자를 지시했고,  그램의 마지막 디테일까지 혁신을 마치게 되었다.


이렇게 디자인에서 포장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이 이어진 끝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로워진 LG의 프리미엄 노트북 그램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과정을 뚝심 있게 완수할 수 있었던 데에는 스티브 잡스의 영향이 적지 않다.  그의 철학과 경험이 제품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확신을 갖는 데 도움을 줬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의 원칙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 작은 부분까지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기에 그램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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