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존재만으로도 빛난다.
아이들 등교 시간 전에 오늘 날씨를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오늘은 낮 기온이 13도까지 오른다고 한다. 올겨울은 유난히 따뜻한 것 같다. 둘째 아이 하교 시간에 맞추어 학교 앞으로 가는 길, 가벼워진 겉옷에 덩달아 마음도 가벼워진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즐겨 듣는 2000년대 댄스곡을 들으니 20대로 다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학교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인 듯했다. 피구를 하며 함박웃음을 짓는 남자아이들, 뭐가 그리 좋은지 겨울에 반소매 티셔츠만 입고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여자아이들. 아이들의 웃는 얼굴은 따스한 햇볕보다 더 빛났다. 윤슬처럼 반짝이는 둘째 아이가 멀리서 손을 흔든다. 엄마가 하교 시간에 나오지 못한, 아이 친구의 얼굴이 시무룩해 보인다.
얼마 전 남편 초등학교 친구의 아내이자 나보다 한 살 어린 연준 엄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엄마가 마중을 나오지 않은 아이의 그늘진 얼굴을 보자, 어린 아들을 남기고 떠난 그녀 생각이 났다.
그녀는 대장암 말기 6개월 시한부 판정에도 6년 동안 버티어 낼 만큼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어린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식을 함께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었다. 오랜 투병으로 조마조마한 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남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는 끝내 어린 아들과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남편과 서둘러 장례식장을 찾았다. 장례식장 1층 로비 중앙에는 각 호실에 안치된 고인의 사진과 상주, 자녀, 손자녀들의 이름이 적힌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90세로 생을 마감한 어느 할머니의 안내판에는 6남매의 이름과 그 자녀들의 이름까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진 옆에는 남편과 아들의 이름만 적혀있어 마음이 더 황량해졌다.
그녀가 있는 호실로 내려가다, 줄지어 서 있는 수십 개의 화환을 보았다. 90세 할머니의 VIP 호실이었다. 자리를 찾지 못한 화환들은 옆 호실 앞까지 침범해 있었다. 이름이 적힌 리본을 치렁치렁 달고 양옆으로 줄 맞춰 서 있는 화환들을 보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검은색 2줄이 있는 완장을 오른쪽 팔에 끼고 있던 누군가가 휴게실에서 안마를 받고 있었다. 그는 평안한 얼굴로 옆 사람에게 호상이라고 말한다. 상갓집에서 들은 호상이라는 말뜻을 정확히 몰라 국어사전에서 그 뜻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호상이란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죽음이었다. 90세 VIP 호실 할머니도 자기 죽음을 호상으로 여기며 마지막 시간을 보냈을지 궁금해졌다.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아니, 사람이 죽었을 때 행해지는 절차를 가까이서 경험한 것은 10여 년 전 시아버지의 장례였다. 그 당시 나는 결혼한 지 1년 된 20대 후반의 새댁이었다. 가까이서 본 첫 죽음이었고, 처음으로 주도적으로 참여한 장례였다. 건강하시던 아버님의 죽음도 갑작스러웠지만, 돌아가신 아버님을 보내드리는 일이 더 막막했었다.
아버님의 죽음을 애도할 틈도 없이 장례식장 직원과 한 테이블에 앉았다. 직원은 신속하게, 경황없는 남편에게 여러 선택을 종용했다. 물론 전부 장례 절차에 필요한 선택지였다. 향나무, 소나무, 오동나무 등 목관의 종류도 다양했다. 모든 선택은 그 결과로 비싼 비용을 내거나, 고인에 대해 미안함을 남겨야 하는 일들이었다. 아버님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뒤로 한 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처음 해보는 장례 절차에 손해라도 볼까 봐 직원의 설명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직원은 목관 중에서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오동나무는 습기에 강하고 무게가 가벼우며 세균의 침투를 막아준다고 말했다. 오동나무 관은 가격도 부담 없다고 한다. 소나무 관은 내구성이 강한 편이고, 향나무 관은 습기에 강하고 벌레를 퇴치하는 효과가 있는 고급 관이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다 말했다.
가로 670㎜ 세로 340㎜ 규격의 나무관은 목재에 따라 가격이 천양지차(天壤之差)였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도 돈이 필요했다. 우리는 화장을 한다는 이유로 가격이 괜찮은 오동나무 관을 선택했다. 잠시 뒤, 회사 상조회에서 전화가 왔다. 화환으로 받을 것인지 현금으로 받을 것인지 물어, 화환으로 받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다니는 회사를 조문객들에게 넌지시 알려주고 싶었다.
두 번째로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한 번 경험해 봤다고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처음과는 다르게 장례 절차에 따르는 여러 선택의 죄책감에서도 한결 자유로워졌다. 회사에서 화환을 할 것인지 현금으로 받을 것인지 물어, 현금으로 받고 싶다고 말했다.
60평 아파트에 살며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비싼 차를 타고 다니던 사람도, 임대아파트에 살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사람도 결국 마지막에서는 가로 670㎜ 세로 340㎜ 규격의 관에서 생을 마감한다. 돈이 많았던 누군가의 마지막은 조문객들과 화환들이 그들이 살아온 삶을 치켜세워준다. 그러나 시끌벅적한 허례허식이 끝나고 나면, 돈이 많았던 누군가도 권력으로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누군가도 서울역 앞에서 종이상자로 추운 겨울을 버텨냈던 누군가도 1평만이 허락된다. 허례허식의 장례 절차는 고인 애도의 본질을 잊은 듯 보인다. 외로운 이들의 마지막을 더욱 외롭게 하는 것 같아 쓸쓸하다.
요즘은 코로나19로 조용히 가족장으로 상을 치르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사람은 그 자체만으로 빛나는 존재이건만, 장례 절차가 돈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화환도 조문객도 옆 상갓집보다 적지만, 그녀의 사진 옆에는 국화가 아닌 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살아생전 좋아했던 향기로운 꽃들의 품속에서, 그녀는 고통을 잊은 듯 웃고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 술잔을 건넸다. 따스한 햇볕보다 더 빛났을 그녀의 어린 시절 모습을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