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바퀴, (난 비록 햄스터를 기르지는 않지만) 햄스터를 기르는 사람들에게는 친밀한 도구일 것이다. 햄스터가 들어가서 달리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 쳇바퀴는 햄스터를 기르지 않는다 해도 늘 당신의 곁에서 소리 없이 돌아가고 있다. 우리는 일상이라는 쳇바퀴에 들어가서 일상을 달리며 쳇바퀴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다. 당신은 이 쳇바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쓰면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본다. 당신도 이왕 이 글을 보았으니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쳇바퀴를 돌리고 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쳇바퀴를 돌리고 있다. 우리는 항상 쳇바퀴를 돌리느라 애를 써서 지치고는 한다. 그래서 가끔씩 쳇바퀴를 벗어나서 새로운 경험을 하거나 새로운 환경에 가서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쳇바퀴는 우리가 혼자 돌리지 않는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아라. 다들 열심해 쳇바퀴를 돌리고 있다.
일상을 쳇바퀴에 비유한 것처럼 이렇게 쳇바퀴를 돌리고 벗어나는 인생을 바느질에 비교하고 싶다. 바느질은 일정하게 할 수도 있지만 간격은 매 순간 조금씩 다르다. 눈으로 보기에 촘촘하고 간격이 일정하다고 다 좋은 바느질은 아니다. 바느질은 그럴지 몰라도 인생은 그렇지 않다. 그 바느질을 하면서의 노력, 행복, 추억 등이 중요하다. 나는 아직 삶을 오래 살지 않았다. 내가 살 앞으로의 날에 비하면 나는 긴 삶을 살지 않았다. 당신이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내가 조금 더 바느질을 해 놓았을 것이다. 그 바느질은 마구잡이고 엉성하겠지만 즐거움, 사랑이 가득 담긴 바느질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내 바느질은 일자보다는 장미꽃을 그리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바느질이 모이고 모인 ‘이 세상’은 꽃으로 비유하고 싶다. 누군가는 그 꽃이 시들어서 말라비틀어져 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꽃봉오리로 보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활짝 핀 꽃으로 보일 것이다. 나에게는 향기로운 새싹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나는 자라고 자라날 새싹이기 때문이다. 향기로운 새싹은 물을 마시고 바람도 맞고 사랑을 받으며 꽃망울을 맺을 것이다. 누구에게는 향기롭고 아름다울 꽃이, 누군가에게는 메마른 꽃이라는 것이 안타깝다. 모두에게 아름다운 꽃으로 보일 이 세상이 올 때를 기다려야겠다.
난 처음에는 이 글의 제목을 '쳇바퀴의 순환 법칙'이라고 지었다. 쓰다 보니 삶의 대한 지루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은 '쳇바퀴가 돌아가면서'이다. 쳇바퀴, 이 세상이 공전과 자전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세상은 항상 바쁘게 돌아가니까 이런 제목이 맞는 것 같다. 나는 법칙, 틀을 싫어한다. 하지만 '쳇바퀴의 순환 법칙'에는 예외가 있어서 처음에 이렇게 제목을 지었다. 사실 예외는 어디에든 있다. 예외가 없다는 예외도 있다. 그래서 이 '향기로운 새싹'은 더 아름다운 것 같다. 이 세상은 어떤 틀에 갇혀있다. 그래도 예외 덕분에 향기로울 수 있다. 그 예외가 바로 '생명'이다. 숨 쉬고 살아가는 이 생명이 예외인 세상의 아름다움이다. 생명 덕분에 이 세상도 예외가 되었다. 틀에 갇혀있다고도 하고 예외라고도 하니 모순적이다. 그래도 괜찮다. 이 세상도 모순적이니까. 난 이 글을 쓰는 지금 '어린 왕자'에 나오는 장미가 생각난다. 세상을 꽃으로 비유해서 장미가 덮게를 쓰고 있는 게 생각나는 것 같다.
나는 예외라는 것이 너무 좋았고, 내가 더욱 특별한 생명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세상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아주 밝은 관종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딱히 재능이라는 것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을 잘한다. 이렇게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나는 잘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냥 인정해 본다. 그냥 인정을 하고 '나는 특별하다.', '나는 글을 잘 쓴다.'이런 착각을 심어 본다. 어쩌면 착각도 믿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착각 또한 믿음으로 나는 살아갈 것이다. 나는 믿음을 믿기 때문이다. 믿음은 참 따뜻하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믿음이 나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주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그 관계로 인생이 구성되는 것이다. 이 관계는 용기라고 할까, 먼저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된다. 먼저 말을 거는 것으로 이 관계는 싹이 나고, 나중에는 잎이 자라고 꽃도 필 것이다. 이 관계는 추억이라는 것을 마시며 자란다.
나는 말을 아주 많이 걸어 많은 싹을 만드는 사람이다. 좋은 관계와는 꽃망울도 맺은 것 같다. 나는 원래 말이 많다. 내가 글을 좋아하는 것도 내가 말하는 것을 종이에 담을 수 있어서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또 글은 조금 더 진정성 있고 소장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쉼 없이 떠들어대서 힘든 나의 입의 유일한 휴식 시간인 것 같다.
내가 중간에 지루한 나의 이야기를 한 것에 대해 사과드린다. 당신도 주위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보아라. 그것에 대한 반응이 따뜻한 반응일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차가운 반응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사람의 관점으로 괜찮은 사람이라면 더욱 따뜻한 한마디로 돌아오리라. 그리고 다른 삶도 이 아름다운 관계 맺는 것을 도와주기를.
추억으로 친해진다고 앞에 적어놓았다. 나의 다이어리를 보면... (어디 보자) 추억은 미래를 위해 쌓는 것이 아니라고 되어있다. 난 어느 날 친구들과 놀고 깨달았다. '언젠 가는 이것도 추억이야.' 이런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추억은 미래, 현재 다 그 감정을 즐기고 공감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만약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나중에 이것이 추억이 되어 있을 미래의 날을 생각해 보아라. 그때는 이 감정이 몽글몽글 해 지면서 행복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면 현재의 나도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쓰다 보니 생각났다. 세상의 많은 것들은 돌아간다. 즉 순환한다는 말이다. 그중에 감정도 순환을 한다. 어딘가에서 받은 감정을 어딘가에서 받은 감정은 나중에 어딘가로 나온다. 꼭 그런 건 만은 아니지만.
나는 싫은 감정을 받으면 그것을 뱉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을 먹는다. 쓰지만 끝까지 삼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나는 늘 밝았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밝지만 언제나 밝아야만 한다. 나의 유일한 장점이자 내가 밝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에 사춘기라 그런지 쌓인 감정을 집에서 뱉어내기도 한다. '작은 아씨들'에 이런 말이 있다. '그는 슬픈 일이 있어도 '새가 날갯죽지에 머리를 묻든'자신의 밝은 모습만 세상에 드러냈다.'라는 무장이 있다. 나는 이 바에르 교수에 대한 이 문장이 인상 깊었다. 나도 '새가 날갯죽지에 머리를 묻듯' 슬픈 일들을 묻어두고 밝은 모습만 세상에 드러내고 싶다. 내가 전한 '밝음'이 남들을 마음을 조금 더 밝게 비추어주길 바란다.
우리 전부 다 처음 겪는 인생인데 이 바느질이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냥 행복하게 살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며 즐기고, 느끼려고 태어나지 않았는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많은 좋은 것들을 생각해 보거라. 우리의 작은 것이다. 기쁨은 크게 생각하며 슬픔은 작은 인생의 부분이라고 생각해라. 이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세상을 사는 행복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