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참외 Jun 17. 2024

뒤돌아보는 영웅, 퓨리오사

영화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 영화 <퓨리오사 : 매드맥스 사가>

영화 <퓨리오사 : 매드맥스 사가>,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의 스포가 있습니다.

스포는 아니지만 뮤지컬 <하데스 타운> 언급이 있습니다.








수많은 신화와 이야기에는 ‘뒤돌아봄’에 대한 금기가 존재한다. 성경에서 환락의 도시 고모라를 떠날 때 뒤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던 롯의 아내, 그는 끝내 뒤를 돌아보고 말았고 그 자리에 굳어 소금기둥이 된다. 그리스 로마신화의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저승에서 리라를 연주한다. 그의 연주에 감동받은 하데스는 에우리디케를 돌려주나, 지상에 올라가기 전까지 뒤를 돌아 그녀를 확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지상에 다다른 오르페우스는 결국 아내를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고, 에우리디케는 다시 지하로 떨어진다. '뒤돌아보지 말라'는 시험을 내리는 건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 치히로는 마침내 부모님과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것은 '뒤돌아보지 않고' 터널을 지나는 것이다. 이왕 돌려줄 거라면, 이왕 보내줄 거라면 조건 따위는 걸지 않는 게 참 좋을 텐데, 신들의 장난질은 너무 고약하고 유치해 그 의도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퓨리오사 : 매드맥스 사가> 속 어린 퓨리오사는 침입자들로부터 풍요의 땅, 그린 플레이스를 지키려다가 납치당한다. 퓨리오사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어머니는 적에게 쫓기자 어린 퓨리오사에게 홀로 도망갈 것을 명령한다. 반항하던 퓨리오사는 어머니와 부발리니 전사들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헤어진다. 그러나 얼마쯤 달렸을까, 어린 퓨리오사의 얼굴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스며든다. 그는 결국 혼자 도망가지 못하고 엄마를 향해 되돌아가고, 적들에게 다시 잡힌 채로 엄마의 죽음을 똑똑히 지켜본다. 빌런 디멘투스는 어린 퓨리오사의 눈물을 찍어 맛보며 퓨리오사를 비웃는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에서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엄마 말을 들을 것이지, 너라도 도망갔어야지, 엄마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았어야지, 쯧쯧.



어린 퓨리오사는 그렇게 엄마를 잃고, 임모탄의 지배하에 있는 시타델에서 지내며 근위대장 잭을 만난다. 잭은 퓨리오사를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자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스승이다. 잭과 함께 부발리니 전사들의 인사를 나누며, 퓨리오사는 그와 ‘함께’ 그린 플레이스로 돌아가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모든 준비가 끝난 어느 날, 잭은 디멘투스의 함정에 빠진다. 잭은 함정에 빠지지 않은 퓨리오사가 혼자 그린 플레이스로 향하기를 바란다. 그는 허공을 향해 초록색 가루탄을 쏜다. 자신은 너를 위해 죽음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으니, 혼자라도 도망가라는 뜻이다. 퓨리오사는 그의 뜻을 받아들여 차를 운전하고, 얼마가지 못해 멈춘다. 그리고 잭을 향해 돌아간다. 엄마를 향해 달렸던 것처럼. 결과는 뻔하다. 디멘투스는 잭을 죽였고 퓨리오사는 왼쪽 팔을 잃는다.


메마른 모래처럼 냉철해 보이는 퓨리오사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고리타분한, 가족과 동료를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고구마 답답이 주인공이다. 그는 사이다와 참교육으로 가득한 요즘 시대의 스토리텔링에 맞지 않다. 상대가 목숨을 걸고 자신을 살려 보낼 때 그는 기어코 돌아와 그들의 죽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스스로를 더 큰 위험에 빠트리고야 만다. 퓨리오사는 어리석다. 그는 결코 사랑하는 이들을 버리지 못한다. 그들은 퓨리오사에게 집이고 또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퓨리오사의 어리석음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영웅이 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가 된다.




매드맥스 속 세상은 핵전쟁 이후 폐허가 된 아포칼립스다. 사람들은 방사능에 오염되고, 식량은 줄고, 땅은 황무지가 되었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나레이션처럼, 인간은 어째서인지 끊임없이 서로를, 스스로를 파괴한다.


시간이 흐른 후 무법자들이 난무하는 황무지는 지난 세대의 잘못을 답습한다. 디멘투스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끔찍한 고문과 살해를 저지르고, 임모탄은 기름과 무기, 지하수를 선점하며 자원으로 사람들을 지배한다. 전쟁 전, 문명 세대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가는 그들에게 파괴와 폭력은 일상이고 권리이자 의무이다. 신나게 사람을 찢고 죽이는 디멘투스의 얼굴은 스크린 너머 관객들에게 묻는 것 같다. 그래서, 정말 이게 답이 아니라고 생각해? 이런 방식이 아니라면, 멸망한 세상에서 대체 어떤 길이 있다는 거야? 퓨리오사가 정말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믿어? 그 모든 질문에 답을 하듯, 퓨리오사는 살아남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고 아포칼립스 속에서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한다.



퓨리오사는 뒤돌아본다. 퓨리오사는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달린다. 퓨리오사에게 구원은 자신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구원이다.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에서 퓨리오사는 홀로 그린 플레이스로 떠나지 않고, 임모탄의 다섯 아내를 데리고 떠난다. 퓨리오사가 마침내 임모탄을 죽이고 빼앗은 시타델은 모두를 위한 시타델이 된다. 아래에만 머무르던 사람들은 위를 향해 올라오고, 물은 모두가 만족할 때까지 끊임없이 쏟아진다. 임모탄의 아내들은 더럽고 지친 사람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민다. 화합과 연대, 서로를 향해 내미는 손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서 다시 꽃을 피우고 생명을 싹 틔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퓨리오사는, 퓨리오사가 이끄는 세상은 그렇게 전멸이 아닌 공존의 세상이 된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이유는, 퓨리오사가 뒤돌아 보는 영웅이기 때문이었다.


퓨리오사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신의 금기를 미련 없이 거부한다. 설령 신이 그에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벌을 내린다 해도, 퓨리오사는 결코 홀로 도망가지 않는다. 그건 퓨리오사의 선택이 아니라 그의 몸에 내재된 본능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위기 상황이 닥치자 미련 없이 부하들을 떠나보내고 혼자 도망가는 디멘투스와는 사뭇 대비되는 점이다. 그래서 결과는? 디멘투스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형벌을 얻었고, 퓨리오사는 시타델의 리더가 된다. 어리석게도 뒤돌아보던 소녀는 디멘투스의 저주를 깨부수고 주인공이 되는 데 성공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재해석한 뮤지컬 <하데스타운> 속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뒤에 두고 걸으며 끊임없는 의심과 두려움에 시달린다. 운명의 여신들은 정말 에우리디케가 그의 뒤에 있을 것 같냐고 물으며 그를 흔든다. 그는 인간이기에 불완전하고, 의심에 취약하다. 그가 과연 뒤돌아볼까? 뒤돌아보지 않을까? 사실 결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오르페우스가 두려움에 흔들리는 불안정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나약한 인간이기에 얼마든지 뒤돌아볼 수 있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고, 또 그렇기에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절망 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건, 이번엔 다를 거라 믿으며 다시 나아갈 수 있는 건 불완전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그건 퓨리오사도 마찬가지다. 퓨리오사는 신이 아니므로 완벽하지 않다. 완벽하지 않으므로 불완전하고, 불완전하므로 흔들린다. 흔들리기에 뒤돌아 보고, 결말을 알면서도 달린다. 어쩌면 이번엔 다를지도 모른다고 믿으면서.



퓨리오사의 왼팔에는 죽은 어머니가, 동생이, 두고 온 가족과 고향이 담겨있었다. 풍요로운 고향을 가리키는 별들은 어머니의 유언처럼 평생 그의 곁에서 반짝일 과거의 파편이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모든 영웅들이 그러하듯 과거를 버리고 잘라내야 할 순간은 결국 찾아온다. 망설임 없이 팔을 잘라내며 소녀는 비로소 어른이 되고, 뜨거운 눈물과 분노 대신 차갑고 메마른 모래만이 남는다. 그러나 가혹한 성인식을 겪은 후에도 퓨리오사는 여전히 뒤돌아본다. 여전히 누군가를, 당신을, 우리를 버리지 못한다. 어른이 된 소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황무지를 달릴 때, 그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역사에 남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