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st] “사랑, 그게 뭔데?“ ”예쁨의 발견.“
“사랑을 해. 그게 어떤 사랑이든, 사랑을 해야만 해.”
균형과 안정을 갖춘 듯한 많은 이들이 사랑을 권했다. 때로는 종용했던 것도 같다. 그렇고말고. 사랑을 해야지. 그것의 형질이 어떠하든, 설사 유일한 무엇이 아니라도. 계속 사랑을 해야만 하는 게 삶이라고 주변의 사람들이 몸소 온 마음을 다해 보여줬다.
오래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 그건 꽤 오래된 나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 삶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는 사랑을 지워야 했다. 항상 부박함이 밑도 끝도 없이 드러났던 건 사랑의 순간이었기에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사랑을 할 때면 내가 흉하게 뒤틀린다는 걸 알아차린 이후, 밝게 달이 뜬 날이면 하늘에 대고 빌었다. 사랑이 아니게 해주세요. 이게 부디 사랑은 아니게 해주세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계절로 봄을 이야기한다. 통상적으로 그렇다. 하지만 나는, 홀로 고개를 가로젓곤 했다. 아니, 겨울이야말로 사랑에 가깝지 않은가? 하려다 도로 말을 말려 없앴다. 나에게 사랑이란 꽃잎이 피어나고 만발하는 봄날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모든 잎을 떨궈낸 채 혹한을 견뎌내는 계절을 닮아 있었다. 해결하지 못한 채 방치하고 있던 이 고민은 학과수업과 연계하여 우연히 받은 상담에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적당한 친절과 냉정이 섞인 대화와 몇 가지 흥미로운 검사 끝에 의사는 한결같은 상냥한 어투로 말했다.
“혹시 경계선 성격장애라고 들어보셨나요?”
심리학 기초 수업에서 얼핏 들어본 진단명을 받았다. ‘내가?’ 하는 무의미한 의문이나 부정은 보이지 않았다. 남들과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지 않았고, 더불어 내 삶이 성격장애라는 단어 하나로 규정되거나 붕괴되지는 않으리라 믿었기에 담담히 받아들였다. 약을 처방하며 의사는 혹 불안이나 두려움이 거세질 때가 있으면 꼭 말해달라고 했다. 있죠. 사랑이요.
약을 먹기 시작한 이후 이렇다 할 뚜렷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불시에 일어나는 증상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알게 된 만큼, 때때로 스스로 브레이크를 거는 순간이 잦아질 뿐이었다. 몇 번의 계절이 커다란 폭풍 없이 떠나고 또 돌아왔으며 그 사실에 무탈함을 느꼈다. 아주 가끔은 무탈함이 ‘공허함’으로 바뀌어 짙은 허무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시간의 보폭에 맞춰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세상에는 회복해야 하는 마음과 별개로 당장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문제가 있었다. 나의 안부를 기다려주지 않는 그것들을 하나씩 성실히 해치우며 어느 시점부터는 약을 챙겨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괜찮아졌고, 의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병원을 빠져나오던 날엔 안도했다.
충실한 하루를 보내는 데 익숙해질 무렵, 한 친구 앞에만 서면 말씨 하나하나에 긴장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머릿속에 경보음이 울렸다. 삐-뽀-. 사랑, 사랑, 사랑. 결국 또 사랑이 시작된 걸까? 일기장은 두터워지기 시작했고, 기록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아지는 만큼 손톱을 자주 물어뜯었다. 다시 시작되고만 사랑에 첫 며칠은 무서웠다. 또다시 무한한 기대와 뒤틀린 실망, 그릇된 행동의 발현이 반복될까 두려웠다. 죽지 않은 내 안의 어린아이가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상상이나 행동을 저지른 뒤에는 홀로 낯뜨거움을 삭이느라 고생했다.
그렇게 되살아난 사랑을 마주한 나는 숨을 고르며 재회의 가능성을 만드는데 집중했다. 예를 들면 2월에 만나 5월의 만남을 약속하는 식이었는데, 이로 인해 다소 뜬금없고 먼 미래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비치기도 했다. 미묘한 감정과 관계가 이르게 끝나지 않길 바라며 새로운 서사의 싹을 틔우기 위해 공들였던 분투의 일부였다. 그 애잔함이 통했던 걸까. 늦저녁의 바다 내음, 일요일 오전 숲길의 아카시아 향기, 무섭게 비가 내리던 밤의 습기 같은 것들이 우리 둘의 옷감에 베이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오후, 그 친구를 기다리다 선잠이 든 적이 있다. 눈을 떴을 때, 하얀 벚꽃잎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봄이구나. 어느새 봄이 왔구나. 어떻게 하면 뚝딱거리지 않으면서 함께 벚꽃길을 걷자고 말할 수 있나 고심했다. 슬며시 미소 짓다 문득, 아직 벚꽃이 피기까지 몇 주나 남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몸을 일으켜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보니 원룸을 허무는 공사장에서 떨어져 나온, 갈라진 페인트 조각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주 하얗고 얇은 조각들이 바람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사랑의 대상을 기다리며 바라보는 그 작은 움직임이 어여쁜 꽃비 같았다. 순간 뺨을 따라 보들거리는 소름이 일었다. 세상의 예쁨을 발견하는 일, 모든 순간이 반짝이는 봄날처럼 느껴지는 마음. 이것이 사랑이었다. 비로소 봄이 왔다.
사랑을 한다면 어떤 제약을 뛰어넘어서라도 상대를 찾아갈 거라는 수많은 이야기를 실감한다. 안전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지켜온, 혹은 지탱해온 질서나 신념 따위를 종종 앞지르게 되는 순간이 빈번해진다. 이는 오직 사랑 때문이고 어쩌면 이러한 균열에서 기적이 피어나지 않을까 기대한다. 방금 도착한 친구의 답을 확인하자마자 다음 주 수요일로 적어두었던 스케줄을 황급히 바꾼다. 다음 주 수요일? 아무것도 없어. 되지, 당연히 되지. 기존의 속도는 온통 흐트러뜨린 채 사랑에게 간다. 멀찍이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무심한 척 인사하려 하지만 자꾸 웃음이 비져 나온다. 난 앞으로도 사랑을 하겠지. 아주 오래 다시 사랑을 할 것이다.
Fin.
From the W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