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st]People, they lie. But hey, so do I
분명 해무가 가득한 도로 위였는데 여긴 어디지. 숨을 들이켰다. 소독약 냄새가 났다. 하얀 천장과 그보다 더 하얀 형광등이 눈에 들어왔다. 사고가 있었던 것 같다.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찌릿한 통증이 목 뒤를 타격했다.
“가만히 있어.”
눈만 돌리자 그곳엔 지우가 앉아 있었다. 햇살 같던 아이. 누구에게나 항상 친절하고 착했던 친구. 그러니까 지우야, 그러지 말았어야지.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아니 그보다, 어떻게 지냈던 거야 대체?”
지우는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평온하게 아주 미세한 떨림만 보일 뿐이었다.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언제였더라? 아주 크게 싸웠었다. 지우가 내내 나를 속이고 있던 걸 알았을 땐 헛웃음이 났고, 아주 조금 소름이 끼쳤던 걸로 기억한다.
“너는 어떻게 지냈어? 그니까 되도록 밤 운전은 하지 말라니까.”
눈가가 살짝 붉어진 지우의 얼굴에 앞머리가 흘러내렸다. 지우는 눈을 가릴 듯 말 듯 한 앞머리를 좋아하곤 했다.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날 타박하는 지우. 몸을 가누지 못한 채로 가만히 지우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아주 오래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매일 같은 향의 섬유유연제를 공유하고, 저녁거리를 치우다 때로는 웃음이 나기도 때로는 화가 치밀기도. 가끔은 서로를 위해 걱정할 권리를 가진 유일한 사람들처럼 비수를 꽂기도 했다. 마지막 날에도 다를 바 없었다.
“걱정했어?”
붙잡을 새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오만하고 염치없었다. 하지만 지우가 나를 걱정해주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마음이 다 해져 어떻게 봉합할 수도 없을 정도의 사랑이었다. 모든 걸 공유한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지우가 사라진 이후로 어쩌면 지난 기억을 저당잡지 않고서는 행복이란 제 곁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정말 몰랐던 일이었다.
“안 깨어날 줄 알고…, 걱정했어.”
지우는 좌로 기울어진 표정을 지었다. 기묘했다. 미동 없이 앉아있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지막 다툼을 끝으로 지우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챈 날이 떠올랐다. 허망했고 화가 났고 속이 끓었다. 쿠션이 다 꺼진 소파에 앉아서 밤을 새웠다.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무서웠고 동시에, 안도했다.
“그렇게 네가 떠나고 많이 무서웠어. 걱정했고.”
내 말에 지우는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드디어 활짝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가슴 아래 찌릿한 기운이 느껴졌다. 손을 뻗고 싶은데 여전히 몸은 말썽이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던 거지. 어느 정도로 다친 걸까. 짙은 안개와 도로, 끝이 없이 반복되던 커브길…. 지우가 다시 나를 보았다.
“그럼 그때 그렇게 말하진 말지.”
도저히 그땐, 지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랬고 그럴 줄 알았다. 사실 지금도 어떻게 지우를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사정이 있었더라도 지우가 아무도 모르게 저지른 끔찍한 행동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왜 그랬는지, 한 번은 물어봐주지 그랬어.”
물어봤다면 달라졌을까? 지우의 행동이 이기적이고 위선적이지 않음을 입증할 수 있었을까. 지금이라도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지우가 들려주는 답을 듣고도 그녀를 마주할 순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반대로 지우의 사정이 진정 어느 누가 들어도 피치 못한 이유였다면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세월의 빛바램을 감당하기엔 겁이 났다.
“오늘도 넌 묻지 않는구나.”
그날처럼 지우는 울지 않는다. 목소리에 살짝 울음이 섞인 것도 같지만 너의 눈동자는 차분하다.
“원호야, 그만 일어나. 너도 알잖아. 지금 너 꿈꾸고 있다는 거.”
- 깜빡, 깜빡, 깜빡.
일정한 주기로 깜빡이 소리가 울린다. 몸을 일으키자 거센 흉통이 느껴진다. 노루인지 고라니인지 알 수 없는 놈이 범퍼 앞에 쓰러져 있다. 깨진 핸드폰 액정을 두드린다. 새벽 3시 34분. 액정에는 오래전에 호주인지 미국인지 캐나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돌산 너머 운해 위로 해가 떠오르는 풍경이 떠올라 있다. 이것도 지우가 설정해놓았던 건데.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었고, 이걸 실제로 바라보게 될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걸 안다.
- 쿵, 쿵, 쿵.
고개를 돌리자 한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괜찮으세요?”
잠금장치를 확인하고서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창문을 내린다.
“네, 괜찮아요.”
남자는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눈을 창 틈 사이로 가까이 붙인다. 조금 어지럽다. 왜 자꾸 말을 시키는 건지 모르겠네. 그냥 모른 척, 못 본 척 가도 그만일 것을…. 다시 졸음이 몰려온다. 이래서 지우가 밤 운전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손을 뻗어 남자를 향해 훠이 훠이 가라고 손짓을 해본다.
“정말 괜찮으세요?”
해무가 점점 자욱해지는 것 같다. 난 더욱더 눈을 똑바로 뜨고 답한다.
“예.”
Fin.
From the W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