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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pode Mar 28. 2023

물속의 이끼 위로 햇살이 내려 앉으면

[East] 아무렴 어때,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데.


물속의 이끼 위로 햇살이 내려앉으면



어수선한 타지의 아침. 이른 산책을 나선다. 어제와 달리 거리에는 햇살이 가득하다. 밤새 다른 세계의 빛이 옅게 씌기라도 한 듯, 세상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빛을 뿜어내는 중이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하얀 건물의 외벽과 촘촘히 자리한 가로수 위 작은 새의 무리, 주위를 지나는 사람들 각각의 표정은 모두 전에 없던 색으로 자신의 존재를 또렷이 드러내고 있다. 생동하는 풍경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우리에 대해 생각한다. 성실히 몰두한다고 하여 분명한 결론이 떨어지는 종류의 사고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다른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때 왕성한 교역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는 이곳은 관광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쇠퇴한 도시 특유의 느긋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거미줄처럼 펼쳐진 수로를 따라 도시 전체에 빈틈없이 드리워져있었다. 덕분에 나는 대체로 아주 한가로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언젠가 함께 약속이라도 한 듯 아주 천천히 걷는다. 만약 내가 다시 이곳으로 여행을 오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그런 이유일 것이다. 정말이지 사람들이 아주 천천히 걷는 동네가 있다고, 하면서.


천천히 걷는 사람들을 앞지르지 않으려 노력하며, 지난밤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축축한 안개와 그 사이를 일정한 간격으로 비추던 수은등. 작은 상점의 불빛들이 물결에 일렁이고, 거기에 우리가 있었다. 분명 오늘과 같은 장소임에도 어쩐지 그것은 전혀 현실의 장면으로 실감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 여행의 첫날밤, 자정에 출발하는 기차 시간을 두어 시간 남겨두고 너와 내가 만났다. 두 잔의 커피는 거의 비워지지 못한 채 테이블 위에서 김을 피워내고, 우리는 운하의 모든 줄기들을 탐험할 기세로 쉬지 않고 걷는다.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걸음은 어느덧 기차역을 향하고, 너는 기차에 오르며 손을 흔든다. 그리고 내가 혼자 남았다. 나는 곧장 숙소를 향하지 못하고, 우리가 걸었던 길들을 한참 헤매다 돌아와 외투도 벗지 않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렇게 아침이 찾아오고, 나는 또다시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너는 아주 먼 길을 떠나온 것이라고 했다. 적어도 열 시간 이상은 기차를 타야 할 것이라고. 지금쯤 처음 들어 본 이름을 한 도시에 가까워졌을 얼굴, 피로한 몸을 의자에 묻은 채 잠에 든 너의 모습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옅은 웃음이 새어난다. 상상은 다시금 기억 속으로 눈길을 돌리고, 이내 현실에 남은 것들과 조우한다. 주저하던 걸음과 한 줄기 햇살처럼 일순 주위를 밝히던 너의 웃음. 일렁이던 불빛들 속 몇 번인가 스쳤던 어깨에는 아직 너의 감촉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건 아마 사랑일까, 사랑은 아닐까, 아무래도 사랑 같은데. 이미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기차가 느닷없이 반대 방향의 선로를 달리지 않는 것과 같이, 이미 자라나기 시작한 감정의 방향이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다. 어젯밤에 떠난 기차가 느닷없이 반대 방향을 향하는 바람에 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이 생긴다면 물론 나는 기뻐할 테지만.


꽤나 먼 곳까지 오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별안간 얼굴을 덥히는 온기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말간 햇살이 머리칼을 길게 흐드러트린 버드나무의 무수한 잎사귀를 지나, 얼굴의 표면을 일렁이고 있다. 멈추어 선 곳은 작은 개천이 지나는 돌다리의 중간 지점이었다. 녹조가 가득 끼어 짙은 초록에 가까운 색을 띤 보통의 개천이다. 어쩌면 이곳은 어젯밤 우리가 지났던 장소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개천은 한없이 평범함과 동시에 어딘가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이곳에 멈추어 잠시 머리를 식히기로 한다. 하지만 걸음이 멎자 자신의 속도로 선로를 나아가는 상념의 움직임은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머릿속에 새겨진다. 주저하는 일 없이 한 방향을 흐르는 것들. 발 아래 펼쳐진 개쳔과 내 속을 나아가는 그것은 어쩌면 서로 꼭 닮아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돌다리의 난간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인 채 아래를 흐르는 개천을 오래도록 내려다본다. 물의 표면 위로 나뭇잎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햇살이 그 사이를 흐르는 중이다. 넘실대며 튀어 오르는 빛의 조각들이 눈을 부시고, 뿌옇게 물속을 채운 녹조 너머의 세계는 영영 미지의 영역으로 남겠다는 듯 묵묵히 한 방향을 향한다. 아래를 아무리 오래 들여다본다고 해도 더 이상 별다른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나는 쉽게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캄캄한 방에 들어선 순간 아무것도 보지 못하던 눈이 차츰 어둠 뒤편의 물체를 구분해내듯, 충분한 시간을 들여 바라본다면 저 너머의 무엇을 발견할지 모른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에라도 마음껏 시간을 들일 수 있는 한가로운 오후였던 것이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햇살은 물의 표면을 지나 미세하게 그 속을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한다. 서두르지 않고 녹색의 입자와 먼지를 한 알 한 알 정성스레 비춘다. 잠시 구름에 가리어지거나 예고 없는 바람에 그림자가 흔들릴 때면 이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까 싶다가도, 어느새 멈추었던 곳에서 다시금 나아가고는 하는 것이다. 햇살은 아주 느리지만 확실하게, 아래로 아래로 스며든다. 세상에서 가장 긴 터널을 서두르지 않고 통과하는 기차의 불빛처럼. 햇살은 고요한 물속을 살랑이는 수초와 어둠 속에서 나타나 그 사이를 휙 지나는 두어 마리의 물고기를 지나, 가장 아래의 바닥에 닿을 때까지 스며듦을 멈추지 않는다. 끝내 더 이상 나아갈 곳을 찾지 못한 햇살은 바닥을 덮고 자라난 이끼 위를 오래도록 서성인다.


“사랑이 전부인 거야.”


이어폰을 타고 넘어온 노랫말이 초록의 이끼 위로 흠뻑 쏟아져 내린다. 사랑이 전부고 전부 사랑이라는 노래. 또다시 무언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 점으로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물속의 이끼 역시 그 사실을 느끼고 있다. 어쩌면 이끼는 아주 오래도록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지도 모른다. 기약 없이 밑바닥을 흐르는 무거운 어둠 속에서 언젠가 누군가의 햇살이 자신에게 닿기를, 시선이 머무르기를, 멈추는 법을 모르는 기차가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르기를 말이다.


‘곧 너를 만나러 갈게.’


너에게 보낼 메세지를 적어내린다.



Fin.

From the 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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