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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키온니 Oct 19. 2022

39세, 승무원이 되다.

2. 어둠 속에서 빛을 찾다.

1) 다시 시작


2018년 1월, 머나먼 타지 생활로 많이 단단해진 나를 발견했고 이제부터는 무엇이든 잘 해내갈 수 있을 거라는 알 수 없는 믿음으로 호기롭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처음 3개월은 정말 좋았다. 조조영화보기, 등산하기, 엄마와 사우나 가기, 제철 과일 맘껏 먹기, 통금시간 없이 24 편의점 즐기기, 돼지고기 먹기(무슬림 국가에서 생활했기에 술과 돼지 관련 음식이 허용되지 않았음) 등등 몇 년 동안 소소하지만 할 수없었던 것들을 누리면서 앞으로의 다가올 미래의 뚜렷한 계획은 없었지만 하루가 아쉬울 만큼 정말 즐겁게 보냈다.


텁텁한 무더위가 조금씩 몰려오던 6월의 어느 일요일,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10분 동안은 멍하니 잘못 들었을까 정말일까라는 생각을 반복하다가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편부가정에서 자라났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일찍 이혼을 하셨지만 어린 나이에도 이상하리만큼 나는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를 너무 좋아했고 따랐으며 어머니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버지는 홀로 나를 지극정성으로 키우셨다.


12세까지는 할머니께서 어머니의 역할을 해주셨는데 어깨너머로 살림을 조금씩 배워 이미 10살 때부터 혼자 수제비를 반죽해 만들어 먹을 만큼 요리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선명한 장면 중 하나는 해가 저무는 집 앞 골목 어귀에 앉아 아버지가 저만치서 퇴근하기만을 늘 기다리곤 했던 거였다. 근엄하고 무서운 아버지가 아닌 다정다감하고 살가우셨던 나의 아버지, 어린 시절 나는 주기적으로 특정 음식에 질려하곤 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맛있고 좋다 한마디 했던 음식이라면 다시는 꼴도 보기 싫을 만큼 질릴 때까지 사다 주셔서 그런 거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혹여나 딸이 꾀죄죄한 모습으로 엄마 없는 아이라는 소릴 들을까 염려돼 새벽마다 내 머리맡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세탁한 교복을 각이 반듯하게 다리고 광이 빛나도록 구두를 닦아 주시던 분이셨다.


홀로 딸아이를 키우느라 몹시 서툴렀을 나의 아버지는 많이 두렵고 힘드셨을 테고 외로우셨을거라 짐작된다. 그런 아버지의 고충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철없는 아이로 그렇지만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홀로 독차지하며 구김살 없는 아이로 자라났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 중 하나가 해가 지날수록 노쇠해지는 아버지를 하루라도 더 자주 뵙고자 했던 것도 있었는데 큰 이유 하나가 상실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때가 되면 죽는다. 생각보다 너무나 덤덤하게 지나갔던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감성팔이로 이용할 생각은 더욱더 없다. 하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 깊은 상실감 속에서 나는 다시 또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슬퍼만 하는 모습을 아버지께서 보신다면 과연 좋아하실까? 언제나 철없는 아이처럼 마음껏 행복해했던 나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셨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께 죄스런 마음이 들 때마다 그리울 때마다 나는 더 삶을 즐기며 행복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 우주, 전부였던 내 아버지가 원하는 바이실 테니깐.. 슬픔은 잠시 나는 다시 힘을 내 열심히 살아 보기로 했다.


카타르항공에서의 5년 반 경력을 내세워 아직은 더 비행을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출, 퇴근하는 기분은 어떨까 궁금했다. 그러던 중 KLM 네덜란드 항공사의 승무원 모집 공고를 접하게 되었고 차근차근 면접 준비를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첫 항공사 준비생 시절에 비해 두 번째 항공사 준비는 생각보다 즐거웠고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흐트러진 정신을 한곳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KLM 네덜란드 항공사는 꿈의 항공사라고 평이 나있을 만큼 복지와 근무환경이 훌륭한 곳이다. 그래서 언제나 경쟁률이 치열했고 몇 달 전만 해도 나는 안 되겠지 생각도 못했던 높은 관문의 항공사였다. 그렇다고 시도도 하지 않고 언제나 쳐다만 보는 것은 너무 바보스럽다고 생각했다. 우선 가장 필요한 것은 만점에 가까운 어학성적이었는데 서류 접수까지는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있었기에 계획을 세워 보았다.


토익보다는 주마다 있는 오픽 시험(말하기)에 집중했다. 비용과 시간이 들더라도 원하는 레벨이 나올 때까지 시험을 봐서 원하는 성적을 얻었고 수십 번 정성 들여 쓴 자기소개서를 준비해 서류접수를 완료했다. 꼭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집중과 정성에 정성을 다했다. 몇 주 후 '서류합격'메일을 받았다.


스펙과 어학 점수가 아무리 높아도 서류전형부터 합격이 어렵다고 소문나 있던 회사로부터 합격 메일을 받다니, 아버지께서 다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나를 도와주신 걸까 완벽한 합격은 아니었지만 이미 마음은 서류 통과만으로 합격 그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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