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이글 Nov 01. 2022

악의를 가진 사람을 조심하라

반복되는 시험에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제안요청서(RFP, request for proposal)는 발주자가 특정 과제의 수행에 필요한 요구사항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제시함으로써 제안자가 제안서를 작성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문서이다. (출처: 위키백과)


연구용역을 수행하는 입장에서 제안요청서는 제안서를 작성하는 데 있어서 지침과 가이드라인을 주는 문서이므로 깨알 같은 부분까지도 참고하여 그대로 따라야 한다. 보통 제안서는 개조식으로 작성한다. 제안요청서에 개조식으로 작성하라고 제시되어 있는 경우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제안서는 개조식으로 쓰는 게 업계 관행이다.


조직에 불만이 많은, 특히 상급자에 대한 불만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연구원이 한 명 있었다. 대놓고 상급자와의 불화가 극심해서 건강상의 문제가 생겼다고 널리 공언하고 다닐 정도로 심각했다. 이 연구원과 불화가 있던 상급자는 본인이 이 사람을 다루기 쉽지 않았음에도, 해고는 쉽지 않고, 업무를 주지 않으면 그것대로 민원을 제기할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와 함께 일하라고 인력을 주었는데,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인사였다.


이 사람과 같이 한 기관의 연구용역에 대한 제안서를 준비할 때였다. 제안서 본문을 거의 다 작성해서 완료된 상태에서 이제 마지막 검토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이때 이 사람이 상기된 얼굴로 나를 찾아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제안요청서에는 "할 수 있다", "가능하다", "고려하고 있다", "가능하다고 본다" 등의 애매모호한 표현은 평가 시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 고 작성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안서 자체를 개조식이 아닌 서술식으로 써야 한다는 의미 아닐까요?"


자, 이 사람은 석사급 연구원으로 근속연수가 7년을 넘은 사람으로 수도 없이 많은 제안서 준비를 박사급 연구원과 함께해본 사람이었다. 고로 당연히 제안서는 개조식으로 지금까지 써왔다는 것도 알고 있고, 해당 발주처의 제안서도 준비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이 사람은 제안서는 개조식으로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제안요청서에 나온 문구를 들먹이면서 내가 본인의 말에 흔들릴지 시험해 보고 있었다.


나는 흥분하거나 들뜨거나 동요됨 없이 조용히 개조식으로 작성하는 게 맞다고 응수하고 이 사람을 돌려보냈다. 가끔 오래 묵은 석사급 연구원은 본인보다 근속연수가 낮은 박사급 연구원이 상급자임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무시하거나 하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식으로 내가 연구책임자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능숙하지도 않은 연기를 하면서 시험해본 것이다.


지금도 다른 용역의 제안요청서를 보면서 그 연구원이 되지도 않는 연기력으로 호들갑을 떨면서 문제 제기한 그 문구들을 보면 지금은 없는 그 악의에 찬 연구원을 떠올린다. 운 좋게 더 이상 같이 일하지는 않지만 그 사람은 어딜 가든 그렇게 살 것이다. 그리고 본인이 상급자의 위치에 자리하게 되면 자기 같은 사람을 만나서 계속해서 시험당하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내 복수는 남이 해주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