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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미 Mar 28. 2023

어릴적 나를 버린 엄마가 죽은지 한달이 지났다.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일주일

어릴적 나를 버린 엄마가 죽은지 한달이 지났다.

이 감정은 분명 슬픈 것이다. 한달이라는 시간동안 6번의 외박을 했고, 하루 9시에 출근해 9시에 돌아오길 반복 했다. 하늘을 봐도 눈물이 나고, 지하철에서도 눈물이나고, 밥을 먹다가도 눈물이 난다.

사람들과 대화할때 잠시 웃었다가 또 눈물이 났다. 이 감정은 분명 슬픈것이다. 아픈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었는데, 책에서는 글이라는것은 쓰지 않았을때 죽을것 같은것이라 말했다. 나는 그래서 지금의 감정과 아픔을 글로 남기기로 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

나를 버린 엄마가 죽은지 한달이 지났다.

초등학교 1학년 내가 8살 나의 첫 학예회 때의 일이었다. 나는 무대위에서 붉은색의자의 앉은 사람들을 한명 한명 쳐다보며 엄마의 얼굴을 찾았다. 나는 이상한 부직포 같은 모자를 쓰고 갈색깔 바닥이 있는 무대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빛때문에 바닥이 흰색, 노랑색으로도 보일때도 있었지만, 모자가 헐렁해서 벗겨질 뻔 했지만,  나는 무대 위에서 찾지도 못한 엄마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손과 엉덩이를 힘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춤이 끝날쯤 멀리 저 멀리 극장 문 앞에서 단발 머리, 귀 밑에는 곱슬거리는 스타일의 엄마와 비슷한 모습을 잠깐인듯 본듯 했다. 엄마가 계속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났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엄마를 만날 수 없었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엄마가 나를 버리기 전 모습이다.


엄마가 나를 버렸다.


언니와 나는 사람들에게 엄마가 어딜같는지 물어본적이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리집을 오갔기에 어린 나이에도 무언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때 부터 알고 있다. 어린아이는 모든것을 알고있다. 기억한다. 잊지 못한다. 정말 다 안다.

사람들은 엄마가 언니와 내가 죽기를 바라는거라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은 집을 나갈때 언니와 내 옷을 모두 태우고 나갔다고, 그래서 너네는 입을 옷도 없다고 말이다.

나는 시골 우리집 나무 옆 구석 불태우는 곳에 내 옷의 흔적이, 옷가지가 진짜로 있는지 보로가지 않았다.
이후 내 옷장도 열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볼 수 없었다. 내가 입을 옷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때의 상황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매일 집에는 사채업자가 다녀갔고, 사람들은 엄마를 찾았다. 밤이 되면 언니와 민트색전화기에 돌아가며 번호를 누르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10통, 20통, 30통 몇통인지는 모르겠지만, 100통은 넘게 전화를 한듯 하다. 엄마가 받을때까지 음성사서함을 남기며 '엄마 어디야. 언제와, 어디야, 보고싶어.'를 몇일 동안 반복했다. 그 기억이 얼마나 생생한지 아직도 꿈에서 음성사서함 넘어가는 목소리가 나온다.


엄마는 우리가 울며 지쳐 자는것을 일상으로 생각할쯤 우리 앞에 나타났다.
매일 볼 수 는 없었지만, 매년 볼 순 없었지만 일년에 가끔 우리에게 다가왔다.
엄마는 미운 사람, 나쁜 사람, 보고 싶은 사람.
나의 감정은 슬프다. 화가난다. 보고싶다. 사랑받고 싶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갔다.


엄마의 죽음 그리고 새벽의 꿈

다시 2023년,

2023년 2월 28일 엄마가 죽었다. 8살이후 같이 산적없는 22년의 이별, 내가 30살의 시점에서 엄마는 또 나를 버렸다. 장례식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죽은날 어이없는 꿈을 꿨기 때문이다.


- 28일 새벽의 꿈 -
엄마는 28일 새벽 내 꿈에 나와서는 나를 버리고 한참 뒤 다시 나타났을 때 모습과 마찬가지로 한껏 꾸민 곱슬머리에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내 앞에 나타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VIP실로 들어가는 엄마를 나는 멀리서 어릴 적 내 모습처럼 엄마! 엄마! 하고 쫓아갔다. 나는 엄마를 꿈 속에서도 잡지 못했다.

아침이 되고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놀라지 말라고, 엄마가 죽었다고. 놀라운 점은 그 뒤 이다. 가족 장을 치루려던 언니와 나였지만, 형부의 누나가 상조회사를 하셔서 일반 장례를 치루게 되었다는 점. 그 배정 된 방이 바로 VIP실이라는 것이다.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일주일

다시 2월 엄마가 죽은지 전 주로 돌아가 일주일.

나는 엄마와 함께 있었다. 엄마가 입원하기 하루 전 문자가 왔다. '계속 아팠었어, 시간 모름'그 메시지를 받은 후 일주일 엄마는 의식을 잃었다. 나는 의식을 잃은 엄마와 함께 있었다. 간병인을 집으로 보내고 임종을 기다리며 엄마와 함께한 일주일, 나는 정확히는 6일이다.


엄마가 죽기 6일전

엄마는 언니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엄마의 눈을 벌리면, 노랑색 황달이 된 눈빛이 있었다. 40kg가 안되는 몸은 퉁퉁 부워있고, 체인지 스톡 호흡을 했다. 대변이 나왔고, 소변은 30ml였다.

사람은 임종을 하기 전 체인지스톡호읍을 하고, 큰 대변을 눈다고 한다. 그리고 소변이 줄며, 목에서 가래소리가 난다고 한다. 근데 그런 죽음의 과정이 엄마를 하나씩 덮치고 있었다. 언니와 나는 번갈아 가며 병원에 있기로 했고, PCR이 내가 먼저 나왔기에 나는 엄마 옆 보조침대에 누웠다. 나는 병원이 무서웠다. 어릴 때 병원에 오랜시간 있기도 했고, 이러한 경험도 처음이 아니었다. 산소호흡기 소리가 멈추는게 너무 무서워서 엄마 손을 꼭 잡고 누워 있었다. 숨소리를 들으며, 보고싶었다. 사랑한다를 몇번을 말했다. 두려웠다. 무서웠다. 화를 다 내지도 못했는데, 따지지도 못했는데, 용서도 못했는데, 엄마가 죽는다는것이 너무 무서웠다. 밤을 새고 간신히 누웠을때, 병원에서 1일차 꿈을 꿨다.

병원에서 1일차 꿈
내 앞에 하얀색 계단이 내려오고 성대한 트럼펫이 울렸다. 흰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오고, 하얀색 구슬을 굴린 후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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