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 레지던트 이블, 웜 바디스, 월드워 Z, 새벽의 저주, 반도, 나는 전설이다, #살아있다."
위에 열거된 영화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쉽게 맞추실 것입니다. 정답은 '좀비영화'입니다. 저는 즐겨보지 않는 장르입니다만, 좀비를 다루는 영화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시체인 좀비여서 영화의 주제로도 죽지 않는 것일까요?
영화판 좀비처럼 R&D판에도 좀비가 있습니다. 소위 좀비기업을 말합니다. 정부 연구개발사업의 지원금으로 연명하는 기업을 일컫습니다. 제가 KISTEP에 근무하면서 R&D 혁신방안을 준비하던 2013년에 좀비기업을 혁신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좀비기업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지 않고, 통계가 없었습니다. 분석을 수행해야 하니 3년 동안 정부 연구개발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술료와 사업화 실적이 없는 기업을 좀비기업으로 정의했습니다. 오래된 통계이긴 합니다만 분석 결과를 소개해 드리면,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정부 연구개발 지원을 받은 11,908개 중소기업 중 6,309개 기업이 기술료와 사업화 실적이 없었습니다. 비율로는 53%에 해당됩니다. 기술료와 사업화 실적을 제출하지 않는다고 정부 지원금 만으로 버티는 좀비기업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만, 반 이상의 기업이 사업화 성과를 내지 않았다는 수치는 정상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최근 뉴스 기사에서 좀비기업이라는 단어를 다시 접했습니다. 6월 말 대통령이 '나눠 먹기, 갈라먹기식 연구개발 투자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지시'하였습니다. 이에 응하여 8월 15일 과학기술혁신본부는 중소기업 복지 성격으로 운영되는 소규모 R&D 사업지원에 문제가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다수의 중소기업이 수천만 원에서 2억 원 미만의 연구개발 지원을 받고 있는데 정작 성과가 나지 않아 사실상 연구개발 예산을 중소기업 지원처럼 운영하고 있다는 판단입니다. 패션 유행이 일정 주기로 돌고 도는 것처럼 R&D 정책에서도 일정 주기로 동일 이슈가 돌고 도는 것일까요? 아니면 죽지 않는 영화판 좀비처럼 R&D판 좀비기업은 죽지 않는 것일까요? 당최.
영화 속 좀비는 부두교의 주술로 살아난 시체였습니다. 최근에는 좀비 바이러스가 살아있는 사람도 좀비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R&D 속 좀비기업은 왜 생긴 것일까요? 현재의 R&D 예산 제도가 좀비기업을 만들었다고 생각됩니다. 정부 연구개발 예산이 수월성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벤처부의 연구개발 사업은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기업 지원은 주력산업으로 키울 기업을 대상으로 합니다. 반면 중소벤처기업부의 R&D 사업은 창업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다수의 기업에게 연구개발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정책의 보편성으로 인해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좀비기업은 이런 제도의 취약 부분을 비집고 들어 온 것이죠.
해결책으로 정부는 성과가 없는데도 재정만 축내는 기업 지원의 소액 사업을 도려내겠답니다. 문제가 있으니 아예 싹을 잘라 버리겠답니다. 저는 이런 방향성에 반대합니다. 소위 좀비기업이 존재하는 것은 맞지만, 정부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업이 더 많습니다. 좀비기업에게 엄한 혜택이 가는 것을 막다가 선량하고 멀쩡한 기업들이 죽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돈줄을 막기보다는 지원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 지원을 받는 기업에게 책임성을 부여하고, 시장에서 인정받는 기술을 가진 기업 만을 선별하여 정부가 지원해 주는 것입니다. 내년 R&D 살림은 올해보다 어려울 것입니다. 어려운 살림에 씀씀이를 마냥 줄일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소비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