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여기는 완전 시골이네’
원래는 오스트리아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뮌헨에서 베니스로 가려면 오스트리아를 거쳐야 했지만 지도에서 보이다시피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아 몇 시간이면 충분히 이탈리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Mr. 해피 가이와의 대화 이후 우리는 계획을 변경했고 마침 그가 추천한 곳도 우리가 갈 길 중간에 있는 '인스브루크'라는 도시였다.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오니 길이 점점 험해지기 시작했다.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지역이라 그런 듯 싶었다. 거기에 일반 승용차보다 사이즈가 큰 캠핑카를 몰았기에 아무래도 운전을 하는 데 애를 좀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운전하길 한 시간쯤, 산고개를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내 눈앞에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나타났다.
'미쳤다, 미쳤어'라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절로 흘러나왔다. 한 시간 전만 하더라도 '아, 괜히 여기로 왔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조금 돌아서 갈 걸'이라고 생각했던 나였었다.
사실 오스트리아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에 껴있는 이 지역에 대해 잘 몰랐으니 기대를 하고 말 것도 없었다. Mr. 해피 가이도 인스브루크에 가보라고 했을 뿐, 이 호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산길을 고생해 가며 운전한 끝에 마주한 뜻밖의 풍경은 생각지도 않게 받은 보너스처럼 느껴졌다. 이런 광경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 차를 잠깐 멈춰 세우고 호수를 찬찬히 눈에 담았다.
그렇게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다 떠나려던 찰나, 여자친구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자친구 : 혹시 호수 주변에 캠핑장 있어?
나 : 있지 않을까? 한 번 찾아볼게.
이대로 떠나기엔 너무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 10분 여정도 그곳에 머물러 있었지만 풍경을 온전히 즐기기에 부족한 시간이었다. 여전히 차가운 호수였겠지만 발이라도 담가 보고 싶었다.
검색을 해 보니 예상한 대로 캠핑장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원래 가려고 했던 캠핑장보다 배는 비쌌기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머물렀던 캠핑장은 인스브루크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주변에는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 있었고 그 이외의 땅은 대부분이 푸른 들판이었다. 들판 위에는 소와 말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었고 봄농사를 준비하려는 트랙터가 자동차보다 더 많았다.
그렇다. 그냥 시골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여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호수와 비교를 하자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장소인데도 말이다.
처음에는 근 며칠간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녀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여행이라지만 어찌 되었든 돌아다니는 건 피곤해지는 일이지 않은가. 뮌헨에서 캠핑카를 인수한 뒤에 여행에 필요한 일들을 하는 게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거기에 산길까지 운전했으니 에너지 소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확실히 도시를 떠나 시골에 오니 제대로 힐링이 되었다. 시골이 주는 고요함과 평온함. 거기에 산 위에 여전히 쌓여 있는 눈 때문이었는지 무언가 모를 특별한 분위기가 느껴졌고 나름 넓은 들판이었기에 시원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이었던 건 캠핑카를 주차시키고 막 내렸을 때 맡았던 시골 특유의 냄새가 아니었을까 싶다.
오스트리아에서 맡는 퇴비 냄새라니.
나는 시골 촌놈이다.
전라남도 진도 출신. 서울에서 진도까지는 차를 타고 6시간이 넘게 걸린다. 그중에서도 내 고향 마을은 읍내에서도 30분은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 중에 시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을에 들어오는 버스는 하루에 고작 3대. 편의점은커녕 작은 마트조차 없는 동네. 마을 인구는 서른여 명. 그마저도 대부분은 70대 이상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내 또래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학생이라곤 오직 우리 형제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어렸을 땐 도시에서 사는 게 꿈이었다. 언제든지 친구들을 불러서 놀 수 있는 게 얼마나 부러웠는지.
대학교를 광주에서 다니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렇게 바랬던 도시 라이프를 누릴 수 있었다. 도시에서 산다는 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편리하고 즐거웠다. 조금만 걸어서 나가면 마트나 편의점이 있었고 최신 영화를 볼 수 있는 영화관에 10분이면 갈 수 있었다.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PC방에서 게임을 하거나 술을 마셔도 언제든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생활 역시 완벽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비교적 조용한 주택가나 아파트 단지에 있을 때도 어딘가 모르게 갑갑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빌딩숲에 둘러 쌓여 내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했다.
뮌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럽 여행의 시작점이었고 대도시인만큼 볼거리, 먹을거리도 많았기에 도착하고 나서 처음 며칠간은 신나게 놀았다.
그러나 즐길 만한 것들을 모두 즐기고 나니 ‘아! 역시 도시는 도시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캠핑장을 벗어나 지하철을 타는 순간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음들은 왜 그렇게 짜증 나던지.
그런 나에게 오스트리아의 시골은 단순한 힐링이 아니었다.
도시 사람들이라면 퇴비 냄새에 질색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골 출신인 나로서는 오히려 정겹게 느껴진달까. 시골에서 20년 넘게 살면서 매일 맡는 게 퇴비 냄새였다. 심지어 농번기가 되면 퇴비 포대를 들고 밭에 뿌리는 게 시골에서의 삶이다. 나 역시 부모님을 도와 퇴비를 뿌리는 일을 수없이 해 봤으니 퇴비는 나에게 아주 익숙한 냄새일 수밖에.
캠핑장 옆 밭에서 풍겨오는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나는 마치 고향에 온 듯한 편안함을 느꼈다. 어쩐지 그날 김치찌개가 끌리더라니. 무의식적으로 엄마가 해주는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생각났던 모양이다. 거기에 한국과는 다른 이국적인 오스트리아의 시골 풍경이 더해지니 그 순간을 어찌 쉽게 잊으리오.
나는 어쩔 수 없는 시골 촌놈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