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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뱅이 Apr 30. 2023

대만도 한국도 일본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

와이프 : 오늘 점심 뭐 먹을래?

나 : 글쎄, 막 땡기는 게 없네.

와이프 : 맨날 모르겠데, 네 똥이나 처먹어라! 씨

나 : 생각나는 게 없는데 어떡해? 흠… 오랜만에 한식 어때?

와이프 : 한식? 무슨 음식?

나 : 김치찌개!

와이프 : 그래, 알았어.

나 : 나 12시까지 수업 있으니까 김치찌개 좀 만들어 줘. 땡큐~


대만에 산 지 벌써 4년이 다 되어 간다. 외국에 오래 살면 현지 음식에 적응할 법도 한데, 여전히 내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는 한식당이 꽤 있는 편인데 최근에 K팝, K드라마의 영향으로 한국 문화에 관심이 늘어나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인이 사장으로 있는 식당을 평하자면 나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적인 맛이 나긴 하지만 뭔가 조금 아쉬운 느낌. 아무래도 대만인들이 주 손님이다 보니 거기에 맞춰 현지화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대만인이 운영하는 식당의 한국 음식은 굉장히 현지다운 맛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대감을 가득 안고 갔다가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때문에 정말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을 먹고 싶을 땐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 요리를 잘한다고 말할 순 없지만, 우리에게는 유튜브가 있지 않은가. 해외 생활만 6년을 넘게 하면서 유튜브의 도움으로 만든 음식이 한둘이 아니다. 덕분에 대한민국 평균 이상의 요리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아! 물론 레시피는 여전히 필요하다.)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한 건 호주였다. 호주는 시급이 높은 걸로 유명하지만 물가 역시 높다. 그중에서 사람의 노동력이 들어간 곳은 더욱 비싸다. 식당이나 미용실은 물론이고 배관공 같은 전문직을 부른다면 몇 십만 원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렇기에 호주에서 요리는 어떻게 보면 살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기술이라고 볼 수 있겠다.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일 많이 만들어 본 건 역시 한국 음식이었다. 당연히 실패한 적도 있었지만 여러 번의 시도를 거치면서 종국에는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대만에 와서는 사정이 좀 달라졌다. 음식 가격이 비싼 건 아니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주변에 제대로 된 한국 식당을 찾기 힘들었다. 전에는 내가 직접 집에서 요리를 했으나 최근에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요리할 시간이 사라졌다. 점심시간이 한 시간 정도인데 아무래도 한국 요리 특성상 시간이 많이 걸린다. 거기에 원체 손이 느리다 보니 미치도록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와이프에게 부탁한다.


사실 와이프가 요리를 못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행운의 상자 같은 느낌이랄까. 생각하는 거 자체가 남들과는 다른 면이 있는 친구인지라 요리마저 창의적으로 하는 편이다. 굉장히 맛있을 때도 있지만 고개가 갸우뚱거리는 맛이 나올 때도 있다. 비단 한국 음식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다른 나라의 음식을 만들 때도 고개가 갸우뚱하는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떤 음식을 처음 만들 때는 꽝일 때가 더 많다. 그러나 내가 요리할 시간이 부족하니 다른 방도가 없었다. 대신 백종원의 유튜브를 알려 주며 수업에 들어갔다.


나 : 제발 이 레시피대로 만들어 주라! 알았지?


하지만 '알았어'라는 대답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수업 시간이 끝나기 10분 전, 방 안으로 김치찌개 냄새가 솔솔 흘러 들어왔다.


'오~ 일단 냄새는 합격'


큰 기대를 하지 않은 탓인지 냄새를 맡은 순간 내 기대감은 한껏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침을 먹지 않은 터라 내 배도 꼬르륵꼬르륵 연신 비명을 질렀다. 한 시간 같은 10분이 지나자마자 나는 방문을 벌컥 열고 주방으로 달려 나갔다. 식탁 위에는 갓 지은 따근따근한 밥 두 공기와 널찍한 그릇에 담겨 있는 김치찌개가 올려져 있었다.


'모양새도 나쁘지 않아'


짜글이처럼 걸쭉한 국물, 그 안에 듬뿍 들어가 있는 돼지고기, 그 위에 올려진 싱싱한 대파까지. 내가 상상한 바로 그 김치찌개였다.


나 : 고마워, 잘 먹을게~



와이프에게 하트 표시를 날리며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한 입 떠먹었다.


'엥, 이게 도대체 뭐야?'


일단 맛이 없진 않다. 아니 사실 맛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아는 김치찌개의 맛과는 조금 달랐다. 김치찌개에 들어가 있는 재료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잘 익은 김치 들어가 있고, 돼지고기도 있고, 다진 마늘도 보인다. 감칠맛이 나긴 나는데 미원의 그 맛은 또 아니고, 미묘하게 단맛도 난다.


나 : 레시피대로 안 만들었지? 또 뭘 더 집어넣은 거야?

와이프 : 쌀뜨물, 김치, 돼지고기, 다진 마늘, 고추장, 식초

나 : 그리고 또?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 확신하며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


와이프 : 가쓰오부시.

나 : 아이고, 또 이상한 걸 집어넣으셨구만

와이프 : 그래서 어때? 맛있어?

나 : 아니, 맛있긴 맛있는데...

와이프 : 맛있는데?

나 : 이건 진짜 한국식 김치찌개라고 보기 힘들지!

와이프 : 에이씨, 그럼 먹지 마!

나 : 아니, 아니 맛있긴 맛있다니까!


남자란 생물이 꼭 이런다. 맛있으면 그냥 맛있다고 하면 될 것을. 김치찌개를 사랑하는 한국인으로 전통의 맛을 훼손하는 것 같아 참지 못하고, 꼭 이렇게 앉아서 매를 번다. 사실 '김치가 맛있어서 맛있는 거지'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이 말까지 하면 등짝 스매시가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일단 배가 고프니 먹는 게 우선이었다. 밥 두 공기에 김치찌개 그릇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은 후에 와이프에게 물어봤다.


나 : 그런데 어떻게 가쓰오부시를 넣을 생각을 했어?

와이프 : 그거? 유튜브에서 봤어.

나 : 한국인 채널?

와이프 : 응

나 : 나는 그런 레시피를 평생 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찾은 거야? 참 신기하네.


가쓰오부시 역시 감칠맛을 내는 재료라 넣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뭔가 일본 음식에만 넣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타코야끼라던가 오코노미야끼라던가. 레시피대로 요리하는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방법이다. 가쓰오부시가 들어갔으니 일본식 김치찌개라고 해야 할지, 대만 사람이 만들었으니 대만식 김치찌개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이 김치찌개가 담겼던 그릇들을 설거지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다음번에는 또 무슨 창의적인 요리가 나올까? 꽝만은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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