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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Dec 18. 2024

마주하고, 도망치고, 찾고

지혜로운 삶의 기술

  얼마 전, 친구를 만나고 들어온 딸이 흥분한 상태로 이야기를 꺼냈다. 신천지를 만났다면서, 너무 멀쩡하고 단정한 두 사람이 콘텐츠를 보고 설문해 달라고 다가왔다고 한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슬쩍 보여준 콘텐츠 한구석에서 '신천지'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슬글슬금 뒷걸음쳤더니 휴대폰 번호를 묻고 집요하게 다음 만남을 잡으려고 애썼다고 한다. 끝내 잘 도망쳐왔지만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보통 사람(?)이어서 놀랐다 한다. 잘 도망쳤다고 엉덩이를 두드려주었다. 대학생 때 포교하고자 하는 여러 사람에 둘러싸여서 끝나지 않은 말다툼을 한 나의 어리석은 과거가 떠올랐다. 호전적인 성향 탓도 있었겠지만 마주하고 싸우는 것이 용기라고 배웠기에 도망치는 것을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누구에게도 도망가는 법을 배운 적도 도망치는 것이 괜찮다고 들은 적도 없다.

요스타케 신스케의 <도망치고, 찾고> 의 한 장면

  큰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주전에 아이들에게 읽어준 요스타케 신스케 작가의 그림책 <도망치고, 찾고>가 떠올랐다. 상상력이 부족하여 남에게 심한 말을 하고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두 다리로 도망가서 너를 지켜주고 알아주는 사람을 찾으라는 내용으로 도망치는 것은 부끄러운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림책을 보면서 무릎을 쳤다. 움직이는 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도 자기 마음이며 변하지 않기 위해 혹은 변하기 위해 움직이라는 문장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아이들을 위해 읽어준 것이지만 감동은 내가 더 받았다.

  잘못을, 과거를, 아픔만큼이나 사람관계에 있어서도 마주하면서 반추하는 것만을 최선으로 여겼던 어리석음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두 다리의 용도를 전혀 모르고 매번 무식하릴만큼 용감하게 마주하기만 해서 참 많이 깨졌다. 그 경험이 나쁘다고만 할 수 없지만 겪지 않아도 되는 쓰라린 상처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귀를 틀어막고 있는 사람에게 울부짖고 뻔히 나를 이용할 사람 앞에 서서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온몸으로 저항할 필요가 있었을까. 온 힘을 다해 싸우기 전에 도망갔으면 조금 다르지 않았을는지 혹은 상처를 덜 받지 않았을까 하는 깨달음에 마음이 급해졌다. 이것만은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욕심으로 몇 번이나 당부했다.


  심리학자 김경일교수 말대로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 나르시시스트를 만나면 도망가라고, 즉, 이상한 사람도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도 굳이 마주할 이유가 없으며 그것이 용기는 아니라 했다. 싸워 이길 필요가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도망가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이해하고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 하고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지라 했다. 체면치레하느냐 가만히 있지 말고 두 다리를 움직여 적극적으로 도망가고 또 나에게 맞는 좋은 사람을 찾아내 손 내밀어 도움을 청하는 힘을 갖는다면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아이들이 사는 세상에는 좋은 사람만 있으면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함을 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나처럼 무식하게 마주하는 법만 익히지 않았음 한다. 나는 몰랐던 삶의 기술 - 도망치고, 찾는 것도 하나의 용기임을 아이들이 알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다. 내 마음과 달리 아이들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피부로 와닿는 이야기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언제든 한 번쯤 떠올리기 바란다. 지혜롭게 삶을 꾸려가기 위해 필요한 기술이니 말이다.

  물론, 아파도 힘들어도 마주해야 하는 것은 있다. 마주해서 이겨내야 하는 가치 있는 것은 분명히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주체적으로 판단해야 하지만 살다 보면 때로는 마주할 때도, 도망치면서 찾아야 하는 것 모두 필요하다. 무엇을 마주해야 할지 또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쳐야 할지 한참 이야기했다. 사람마다 조금 다르겠지만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으로부터는 도망치자고 모두 동의했다. 그리고 살면서 꼭 자신을 이해해 주고 알아주는 사람은 찾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우리 아이들이 나보다 훨씬 지혜롭게 살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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